김왕식
■
고요의 기술
*이상엽 시인
수술대 위,
나는 늘 말보다 손을 믿었다
뼈는 말을 하지 않기에
기억은 골절 부위에 숨어 있었기에
집도의로 산 세월,
단어는 늘 뼈처럼 단단하고
대화는 고통을 짜 맞추는 핀셋이었다
침묵은 환자의 통증을 듣는 기술이었고
그러다 문득,
청람의 오후를 지나며
고요라는 단어가
내 마음속 가장 깊은 부위에 정착했다
고요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
관절도 숨 쉬지 않던 시간이고
삶을 접고 돌아갈 때,
다시 닿을 침묵의 무릎이다
나는 이제 고요 앞에 앉아
단어보다 깊은 해부도를 펼친다
말없이 뼈를 돌보던 내 손이
이제는 내 영혼을 매만진다
고요는 종교가 되었고
나는 그 믿음의 신도다
낱말 대신 정적을 처방하는
은밀한 의술의 끝에서
□■
이상엽 시인
경복고 53회 졸업
정형외과 닥터로
한평생 인술을 베풀고 있다.
무릎 관절 수술 명의이다.
광명 성애 병원에서 현직에 있다.
■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ㅡ
이상엽 시인의 '고요의 기술'은 단어 하나를 중심으로 평생을 살아온 의사의 손끝 철학과 존재에 대한 내밀한 사유를 응축한 작품이다. 시인은 오랜 세월 정형외과 의사로서 수많은 환자의 통증과 마주해 왔다. 그러나 그가 의지한 것은 언어가 아닌 '손'이었다. 뼈의 침묵을 듣고, 단어 대신 정적을 처방하며 고요 속에서 삶의 본질을 바라본 이력은 그의 삶의 가치철학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에게 고요는 단순한 정적이 아니라, 인간의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거대한 시간이며, 의사의 눈을 넘어 철학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삶의 본질이다. '고요는 종교가 되었고 / 나는 그 믿음의 신도다'라는 구절은, 고요를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삶 전체를 관통하는 윤리적 중심축으로 받아들인 시인의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가 말하는 ‘의술의 끝’은 육체를 넘어선 치유, 곧 영혼을 매만지는 침묵의 손길이다.
미의식 면에서 볼 때, 이 시는 의학적 실재를 바탕으로 한 상징과 은유가 긴밀하게 얽혀 있다. ‘골절’, ‘핀셋’, ‘해부도’ 같은 직업적 언어들이 단순한 기능을 넘어 시적인 깊이로 확장되며, 시인은 이를 통해 삶의 고통과 고요를 하나의 예술로 승화시킨다. 또한, 과장 없는 절제된 언어, 정제된 감정 표현, 그리고 형이상학적 고요에 대한 경외감은 시인의 미적 감각이 일상과 사유를 동시에 아우를 수 있음을 증명한다.
요컨대, 이상엽 시인의 시는 의사의 삶과 시인의 사유가 만나는 경계에서 탄생한 존재의 서사이며, 단어의 무게를 손끝의 기억으로 끌어올린 고요한 찬가이다. 그는 말보다 고요를, 치료보다 성찰을 택함으로써, 인간의 내면에 잠든 침묵을 깨우는 미학과 철학을 동시에 완성해 낸다. 이 작품은 치유와 시가 하나의 지점에서 만나고 있다는 점에서, 삶 자체를 예술로 만든 고백이자 증언이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