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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질 녘 버스 창에 기대는 사람들 ㅡ청람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해 질 녘 버스 창에 기대는 사람들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면,
버스 창문에는 느린 금빛이 번져오기 시작한다.
회사들이 하나둘 불을 켜고,
거리의 그림자들이 길게 늘어지는 그 시간.
사람들은 퇴근길 버스를 타고
하루의 마지막 무게를 조용히 가슴에 내려놓는다.
창가 쪽 빈자리가 있으면
윗몸을 살짝 기대어
내 마음에게도 기대어 보라는 듯이.

창문에 비친 얼굴은
언뜻 보면 평온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낮 동안 쌓인 작고 큰 일들이
혼자서 모여 웅크리고 있다.
혼자서만 알고 있는 걱정,
말하지 못해 눌러둔 말,
누군가를 향해 애써 웃었던 순간들.
그 모든 것들이 자리에 앉은 그 사람의 속에서
조용히 시간의 무릎을 베고 있다.

버스가 출발하면
상점의 간판들이 차창을 스치며
빛의 흔적을 남긴다.
마치 하루의 잔상들이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것 같다.
누구에게도 크게 들리지 않는
속삭임 같은 풍경들이다.
그런 풍경 속에서
사람들은 말없이 마음의 속도를 천천히 낮춘다.

버스에 앉은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다.
마치 이 시간만큼은
각자의 내면으로 돌아가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는 듯하다.
얼굴을 굳이 보지 않아도
이 시간의 공기에는
‘다들 오늘도 잘 버텼다’는 조용한 공감이
어디엔가 묻혀 있다.

한창 피곤한 표정의 젊은 남자는
헤드폰을 끼고 창문에 머리를 살짝 비스듬히 기댄다.
음악이 들리는 듯도 하고,
그저 고요를 듣고 있는 듯도 하다.
창밖의 건물들이 흘러갈 때
그의 눈빛도 조금씩 풀린다.
오늘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버스 창에 기대는 그 순간만큼은
세상과의 거리가 한 뼘쯤 멀어진 듯하다.

앞자리에는 중년의 여성이
장바구니를 무릎 위에 올려둔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눈동자가 빛을 천천히 따라간다.
어쩌면 가족의 저녁상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저 바람의 결을 느끼며
머릿속을 비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구도 그녀에게 묻지 않지만
그 고요함이
오늘 하루에 대한 조용한 위로처럼 보인다.

뒷자리에는 학생이 앉아 있다.
교복 깃에 묻은 페인트 얼룩을 보아
미술 시간에 무언가 열심히 그렸던 듯하다.
가방을 껴안고 창가에 머리를 기대니
피곤한 하루가 살짝 새어 나온다.
그 눈매에는
수업 시간의 복잡함보다
창밖 노을빛이 더 깊게 스며 있다.
어린 마음도 하루가 저물면
어른들과 비슷한 피로를 품는다.

버스가 큰 사거리를 지나면
노을이 더욱 붉게 창문을 물들인다.
그 빛이 사람의 얼굴에도 가만히 내려앉아
누군가의 걱정을 조금 누그러뜨린다.
사람들은 말없이 창밖을 보면서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아주 작은 숨을 내쉰다.
그 소리는
스스로를 다독이는 낮은 속삭임 같다.

누군가에게 버스 창은
잠시 도망칠 수 있는 작은 숲이다.
누군가에게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사적인 공간이 된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오늘 하루를 마음 안에서 마무리하는 책갈피가 된다.
명확하게 말하지 않아도
모두에게 이 시간은
하루 중 가장 조용한 ‘내 편’의 시간일지 모른다.

버스가 언덕을 넘을 때
창밖의 풍경이 천천히 사라진다.
대신 거울처럼 비친 창문에는
자기 얼굴이 담긴다.
그 얼굴을 바라보며
사람은 잠시 멈춘다.
빛에 젖은 피곤함,
조금은 지쳐 내려앉은 눈매,
그 속에 숨어 있는 온기까지―
모두 오늘을 살았다는 흔적이다.

도착지 가까워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 몸을 바로 세운다.
기대를 떼고,
마음을 회수하고,
내릴 준비를 한다.
버스 문이 열리면
하루의 남은 힘을 모아
각자의 저녁으로 들어간다.
창문에 기대던 모습은
버스 안에 가만히 남고
사람들은 또 다른 시간으로 나아간다.

그 짧은 기댐의 순간이
사람의 하루를 조금은 바꾸어 놓는다.
어깨의 긴장도,
가슴 깊숙한 피로도,
그 순간만큼은
창문 너머로 흘러가는 풍경과 함께
조금씩 풀려나기 때문이다.

해 질 녘 버스 창에 기대는 사람들.
그 조용한 무리들은
서로를 모른다.
그러나 같은 시간을 지나며
서로의 마음을 어렴풋하게 이해한다.
이해한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이 시간의 공기가
대신 말해준다.

“모두, 오늘 참 잘 견뎠다.”

그것만으로
사람은 다시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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