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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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가 시작되는 자리
청람 김왕식
오해는 대개 큰 사건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사소한 말 한마디, 건너뛴 설명, 잠시 늦어진 응답 같은 것에서 조용히 싹튼다. 그때 우리는 그것을 오해라 부르지 않는다.
그저 “별일 아닌 일”로 넘긴다. 그러나 넘겨진 일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 어딘가에 얇게 쌓인다.
오해는 말이 많아서 생기지 않는다.
외려 말이 빠졌을 때 생긴다.
해야 할 말이 빠지고, 확인해야 할 마음이 생략될 때, 사람은 자신의 해석으로 빈자리를 채운다. 그 해석은 언제나 자기 경험을 닮는다. 그래서 같은 침묵도 누군가에게는 배려로, 누군가에게는 무관심으로 읽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다.
누가 잘못 읽었는지를 따지는 순간, 오해는 이미 관계의 중심으로 들어와 있다. 오해는 논리로 풀리지 않는다. 그것은 감정의 언어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감정은 설명을 듣기보다 태도를 본다.
많은 오해는 확인을 미루는 데서 깊어진다.
괜히 물어봤다가 더 어색해질까 봐, 괜히 말 꺼냈다가 상처 줄까 봐 우리는 침묵을 택한다.
그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침묵은 언제나 해석을 허용한다. 그리고 해석은 대개 최악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성숙은 오해를 없애는 능력이 아니라, 오해를 다루는 태도다.
오해가 생겼을 때 곧바로 해명하려 들지 않는 일,
그렇다고 방치하지도 않는 일. 필요한 것은 빠른 말이 아니라 적절한 타이밍의 진심이다. 진심은 서두르지 않지만, 끝내 도착한다.
오해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쉽지 않다.
“왜 저렇게 받아들였을까”라고 묻기보다, “내가 무엇을 남겼을까”라고 묻는 일은 언제나 불편하다. 이 질문을 건너뛰는 한, 같은 오해는 다른 얼굴로 반복된다. 관계가 바뀌어도 패턴은 남는다.
우리는 종종 오해받지 않기 위해 더 많은 말을 하려 한다.
오해를 줄이는 것은 말의 양이 아니라 말의 책임이다. 내가 던진 말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어떤 결로 남을 수 있는지를 상상하는 일. 그 상상력이 관계를 지킨다.
오늘,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나와 누군가 사이에 놓인 이 침묵은
피로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인가.
그 질문을 피하지 않을 때,
오해는 비로소 시작점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관계는 다시 말할 기회를 얻는다.
ㅡ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