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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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론 詩人論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시인이 된다는 말은 하나의 직함을 얻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와 맺는 관계의 결이 바뀌는 순간을 가리킨다. 직업은 역할을 규정하지만, 시인은 존재의 태도를 규정한다.
소설家, 수필家, 평론家가 ‘무엇을 쓰는가’로 불린다면, 시인은 ‘어떻게 사는가’로 불린다.
해서, 우리는 ‘시가(詩家)’라 하지 않고 ‘시인(詩人)’이라 부른다. 시는 기술 이전에 사람의 문제이며, 시인은 작품 이전에 삶의 자세로 호명되기 때문이다.
시인은 단순히 시를 짓는 사람이 아니라, 시의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시의 조건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설명보다 침묵을, 논증보다 여백을, 주장보다 떨림을 요구하는 조건이다.
시는 세계를 정복하지 않는다. 다만 세계에 귀를 기울인다. 언어가 닿기 이전의 감각—숨의 속도, 빛의 결, 상처의 온도—을 먼저 감당하는 이가 시인이다.
시는 시인보다 앞서지 않는다. 시가 맑으려면 시인의 삶이 먼저 흐트러지지 않아야 한다. 문장은 삶의 파문이며, 어휘는 태도의 흔적이다.
시인은 시만 잘 지어서는 안 된다. 정교한 시어의 조탁과 치밀한 이미지의 배치는 시작일 뿐이다.
그것은 기술의 문제이지 존재의 문제는 아니다. 시인의 고유성은 언어의 절제에서 비롯되며, 그 절제는 곧 삶의 윤리로 이어진다.
함부로 말하지 않는 사람, 쉽게 단정하지 않는 사람, 자기 감정을 세계의 중심에 두지 않는 사람. 이러한 인격의 결이 없으면 시는 곧 과잉이 되고, 언어는 장식으로 전락한다.
시는 빛나기 전에 견뎌야 한다. 견딤이 없는 아름다움은 오래 남지 않는다.
시인은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말을 오래 견디는 사람이다. 시는 대체로 늦게 온다. 기다림을 통과하지 못한 시는 조급한 문장이 된다.
하여, 시인의 시간은 현실보다 늘 한 박자 늦다. 그 느림 덕분에 시인은 사물의 이면을 보고, 감정의 바닥을 듣는다.
이 느림은 무능이 아니라 윤리다. 세계를 함부로 규정하지 않겠다는 태도이며, 타인의 고통을 쉽게 설명하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시인은 서둘러 해석하지 않는다. 먼저 침묵하고, 끝내 증언한다.
시인이 ‘인(人)’으로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는 인간을 이해하는 가장 마지막 언어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삶의 앞줄에 서서 외치지 않는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조용히 지켜본다. 시인의 언어는 선동이 아니라 증언이며, 선언이 아니라 기록이다. 그래서 시인의 말은 적지만 오래 남는다.
한 편의 시가 한 사람의 생을 건너는 데에는, 그 시를 쓴 사람의 삶이 이미 그 길을 먼저 건넜기 때문이다. 시는 사건이 아니라 흔적이며, 흔적은 살아온 방식의 결과다.
결국 시인이 된다는 것은 시를 짓겠다고 결심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겠다는 선택이다. 더 천천히 보고, 더 깊이 느끼며, 덜 말하겠다는 다짐이다.
시인은 언어의 장인匠人이기 이전에 침묵의 책임자다. 침묵은 회피가 아니라 윤리이며, 여백은 결핍이 아니라 신뢰다. 시가 사람을 살린다면, 그것은 시어의 화려함 때문이 아니라 그 시어를 견뎌낸 한 인간의 자세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는 ‘시가’가 아니라 ‘시인’이라 부른다. 시를 짓는 사람이 아니라, 시로 살아내는 사람을. 세계의 소음 속에서 언어를 낮추고, 낮춘 언어로 다시 세계를 일으키는 사람을.
이 이름은 영예가 아니라 책무다.
바로 그 책무가 시인을 시인으로 만든다.
그 길 위에서,
시는
비로소
인간의 언어가 된다.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