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보리





혹한을 건너는 빛의 윤리
보리의 압권은 혹한을 견딘 뒤에야 드러난다.
청보리가 바람을 만날 때, 그 잎들은 개별의 몸을 고집하지 않는다.
한 줄기 바람에도 밭 전체가 응답한다.
푸른 줄기들은 서로의 등을 밀지 않고, 앞서지도 않는다.
파도처럼 일렁이며 물결이 되고, 물결은 다시 들판의 숨이 된다.
여기에는 경쟁의 각이 없다.
오직 함께 흔들리는 법만이 있다.
청보리는 바람을 이기는 대신, 바람의 방향을 받아들이며 아름다움이 된다.
이 일렁임은 유약함이 아니다.

혹한 속에서 뿌리를 단단히 내린 자만이 허락받는 유연함이다.
눈발과 서릿발을 통과하지 않은 잎은 바람 앞에서 찢어진다.
밟혀본 적 없는 줄기는 흔들림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청보리의 푸름은 가벼운 색이 아니다.
견딤이 색으로 바뀐 결과다.
낮아졌기에 넓어졌고, 눌렸기에 이어졌다.

그 파도는 생의 합창이다.
여름이 오면 보리는 황금으로 변한다.
이 변화는 단번에 오지 않는다.
푸름은 서서히 물러나고, 수분은 빠져나가며,
이삭은 고개를 숙인다.
무게가 생겼기 때문이다.
알곡을 품은 존재만이 고개를 낮춘다.
황금빛 보리는 성숙의 다른 이름이다.
더 드러내지 않아도 충분해진 상태,
말을 줄여도 의미가 사라지지 않는 단계다.

보리 이삭의 성숙은 곧 인생이다.
젊음의 푸름이 바람에 춤추는 시간도 필요했으나,
결국 삶은 무게를 견디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빛은 더 진해지고, 몸은 낮아지며,
자신을 과시하던 각들은 둥글게 마모된다.
그때 비로소 생은 수확을 허락한다.
성숙이란 얻는 일이 아니라,
지켜낸 것들이 남아 있는 상태다.
보리는 가르치지 않는다.
설명하지도 않는다.

다만 계절을 통과한 몸으로 보여준다.
혹한에서 시작해 파도로 흔들리고,
마침내 황금으로 잠잠해지는 길.
그 길은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정확하다.
인생이 그렇듯,
끝내 남는 것은 함께 흔들린 기억과
묵묵히 익어간 시간뿐이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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