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에 대하여 — 필요 너머에서 빛나는 인간의 여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멋에 대하여
— 필요 너머에서 빛나는 인간의 여유





김왕식





‘멋’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이미 멋이다. 설명을 붙이기 전에도 감각적으로 이해되고, 정의를 시도하는 순간 오히려 손아귀에서 빠져나간다. 멋은 사전에 갇히지 않는다. 그것은 개념이 아니라 태도이며, 결과가 아니라 존재의 기류다.
해서, 멋을 말한다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삶의 자세를 말하는 일에 가깝다.

혹자는 멋을 ‘필요 이상’이라 말한다. 이 정의는 단순하지만 정확한 핵심을 건드린다. 필요 이상의 행위란 생존과 효율의 범주를 넘어서는 선택이다.
허나, 이를 곧바로 ‘불필요함’이라 치부할 수는 없다. 불필요하다는 판단은 실용성의 기준에서 나온다. 실용은 경제성을 지향한다. 비용과 효율, 기능과 결과를 중심으로 판단한다.
이 질서는 사회를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인간의 삶이 오직 실용만으로 구성된다면 그것은 기능적일 수는 있어도 아름답지는 않다. 멋은 바로 그 지점에서 등장한다.

멋은 실용의 외부에서 시작된다.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일에 시간을 쓰고, 하지 않아도 되는 배려를 더하며, 없어도 되는 여백을 남겨 두는 태도에서 멋은 드러난다.
그것은 낭비가 아니라 여유다. 인간이 단순히 살아남는 존재를 넘어 살아가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방식이다. 필요 이상의 선택 속에서 인간은 자신만의 온도를 드러낸다. 그 온도가 곧 멋이다.
멋은 과시와도 다르다.
과시는 타인의 시선을 겨냥하지만, 멋은 내면의 질서를 따른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도 유지되는 태도, 알아주지 않아도 지속되는 품위에서 멋은 살아난다. 옷차림의 단정함이든, 말 한마디의 결이든, 작은 배려의 방향이든 그것이 타인의 평가를 떠나 자연스럽게 유지될 때 비로소 멋은 완성된다. 멋은 꾸밈이 아니라 축적이다.

또한 멋은 절제와 연결된다.
필요 이상을 택하는 동시에 과함을 경계하는 균형 속에서 멋은 빛난다. 지나침은 화려함이 될 수는 있으나 멋이 되지는 않는다.
멋은 드러내기보다 남겨 두는 데서 생긴다. 말을 아끼고, 행동을 가볍게 하며, 여운을 남기는 태도 속에서 멋은 깊이를 얻는다. 결국 멋은 많음이 아니라 적절함의 미학이다.

삶을 돌아보면 멋은 거창한 장면에 있지 않다. 누군가를 기다려 주는 몇 분의 여유, 불편함을 감수하며 타인을 배려하는 선택, 이익이 되지 않더라도 지키는 약속 같은 순간 속에 존재한다. 그것은 계산되지 않는 선택이며, 그렇기에 더욱 인간적이다. 실용의 계산을 넘어서는 자리에서 인간은 비로소 품격을 드러낸다.

멋은 인간이 기능 이상의 존재임을 증명하는 표지다. 효율과 결과만을 좇는 삶은 정교할 수는 있으나 건조하다. 그 건조함을 적시는 것이 멋이다. '필요 이상'의 선택을 감당할 줄 아는 마음, 불필요해 보이는 여백을 기꺼이 남겨 두는 태도, 그 속에서 인간의 삶은 비로소 숨을 쉰다.

멋이란 외형의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방식이다. 실용을 넘어서되 현실을 떠나지 않고, 여유를 지니되 과시하지 않으며, 절제 속에서 빛나는 태도다. 그렇게 살아갈 때 삶은 단순한 기능의 연속이 아니라 한 편의 품위 있는 서사가 된다.
멋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며드는 것이며, 스며든 멋은 말없이 사람을 드러낸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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