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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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앉아 있는 일
사람들은 흔히 움직임을 일이라 생각한다.
손이 바쁘고 몸이 분주해야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믿는다. 눈에 보이는 노동은 쉽게 이해되고 쉽게 인정된다.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은 종종 오해받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한때 시체 보관소 곁에 오래 앉아 있었다고 전해진다. 말없이, 거의 움직임 없이, 그 자리에 오래 머물렀다. 그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침묵의 시간 속에서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 존재의 무게 같은 것들을 오래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시인은 종종 말보다 오래 침묵 속에 머문다. 그 침묵 속에서 언어는 서서히 자라난다.
그와 대조적으로 건설 현장의 노동자는 쉬지 않고 움직인다. 철근을 옮기고 콘크리트를 붓고 높은 곳에 올라 몸을 기울인다. 그들의 노동은 분명하고, 땀과 소리로 가득하다. 눈에 보이는 세계를 실제로 세우는 일이다. 그 노동은 존엄하고 분명하다.
그 옆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 앉아 있는 시인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세운다.
사실 시인에게 가만히 앉아 생각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생각은 종종 몸보다 더 무거운 노동이다. 움직이지 않고도 오래 버텨야 하며, 스스로에게서 도망치지 않아야 한다. 가만히 앉아 있다는 것은 단순히 쉬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끝까지 남아 있는 질문과 마주하고 있다는 뜻일 때가 많다.
릴케가 그 자리에서 오래 앉아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삶을 더 깊이 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움직이지 않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소리보다 조용한 것들, 사건보다 오래 남는 감정들,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의 결들이 그렇다. 시인은 그런 것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오래 앉아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흔히 바쁜 삶을 성실함으로 여기지만, 때로는 멈춰 서는 일이 더 큰 성실일 수도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이 사실은 가장 치열한 시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건설 현장의 노동자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세운다면, 시인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세운다. 하나는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다른 하나는 침묵과 사유로.
시인이 가만히 앉아 있는 일은 결코 빈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다르게 이해하려는 노력이며, 삶의 깊이를 받아들이려는 태도다. 움직임이 없는 자리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일하고 있다. 다만 그 일은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 앉아 있는 시간, 그러나 가장 많은 것을 하고 있는 시간. 그 시간을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말 하나가 생겨나는지도 모른다.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