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젖은 가방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비에 젖은 가방






비는 위에서만 내리지 않았다.

그날 저녁, 비는 사람의 마음에서도 내리고 있었다. 우산 없이 나선 하루가 저물 무렵까지 무사할 것이라 믿었던 나는, 거리 한복판에서 뒤늦게 비의 문장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젖는다는 것은 단지 물에 스미는 일이 아니라, 예상하지 못한 온기에 닿는 일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아침에는 비 기색이 없었다. 흐리긴 했지만 곧 걷힐 하늘처럼 보였다. 그래서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 하루는 평소처럼 흘러갔고, 일과와 말들 속에서 비의 예감은 잊혔다.

저녁 무렵, 빗줄기는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고 거리는 금세 젖은 냄새로 가득 찼다. 보도블록은 어둡게 번들거렸고 사람들은 저마다 어깨를 움츠린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 역시 비를 피하지 못한 채 걷고 있었다. 젖어드는 옷자락이 신경 쓰였지만, 그보다도 길 위에 혼자 서 있다는 감각이 더 또렷하게 다가왔다. 비는 사람을 조용하게 만들고 동시에 낯설게 만든다. 그때 뒤에서 발걸음이 가까워졌다.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사내 녀석 하나가 다가와 말없이 우산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사양했다.

괜찮다고,

금방 갈 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녀석은 고개를 젓고 우산을 더 가까이 디밀었다. 그 손짓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비를 함께 맞을 이유도, 나를 알 이유도 없는 아이였다. 그럼에도 녀석은 자연스럽게 나와 나란히 걸었다.


잠시 함께 걷는 동안 말은 거의 없었다.

다만 우산이 내 쪽으로 더 많이 기울어 있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몇 번이나 괜찮다고 말했지만, 녀석은 대답 대신 손잡이를 조금 더 세게 잡았다. 그 조용한 고집 속에서 묘한 따뜻함이 전해졌다. 길 위의 짧은 동행은 이상하리만큼 오래 남는 시간을 만들었다.


헤어질 지점에 이르렀을 때, 뒤늦게 녀석을 바라보았다. 교복 어깨는 이미 젖어 있었고, 등 뒤에 멘 가방은 흠뻑 젖어 축 늘어져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나를 더 많이 씌우느라 녀석의 가방이 비를 대신 맞고 있었다는 사실을.
순간 마음이 멎는 듯했다.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채 서 있었고, 녀석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돌아섰다. 그 뒷모습은 금세 비 속으로 스며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젖은 가방이 자꾸 떠올랐다. 그 가방은 단순히 비에 젖은 물건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마음이 담긴 자리였고, 타인을 위해 조금씩 젖어도 괜찮다는 태도의 형상이었다. 우리는 큰 친절보다 이런 작고 조용한 배려를 더 오래 기억한다.
지금도 비 오는 날이면 문득 그 녀석의 젖은 가방이 떠오른다.

그때마다 마음 한쪽이 조용히 젖는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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