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는 것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글을 쓴다는 것
— 사라지는 순간을 붙드는 일에 대하여





해 질 녘
깊은 산사 고즈넉한 바위에 걸터앉아
붉은 하늘을 본다

저녁은 언제나 조용히 무너진다
그 무너짐은 파괴가 아니라 스며듦이다

빛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빛이 사라지는 방식이 천천히 드러나는 시간이다

바위는 아무 말이 없고, 바람도 스스로를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지키며,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그 자리에 사람이 하나 앉는다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속에 몸을 놓고,
생각을 밀어내지 않아도 되는 침묵 속에 자신을 내려놓는다

그때 문장은 생기지 않는다


외려 문장 이전의 상태,
말이 되기 전의 어떤 떨림 같은 것이
가만히 마음속에 번져온다

그것은 생각이 아니다
느낌이라 부르기에도 조금 부족하고
감정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맑다

그저 존재가 스스로를 느끼는 순간에 가까운 것이다

석양은 산 너머로 천천히 기울고
빛은 사라지면서 오히려 더 깊은 색을 남긴다

그 색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몸 어딘가에 스며들어
나중에야 비로소 ‘그때 좋았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종류의 것이다

그 순간,
시는 이미 완성되어 있다
종이에 적히지 않았을 뿐이다

누군가의 눈에 읽히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그 순간의 숨결, 그때의 공기,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자신의 존재까지 모두 포함한 채
이미 하나의 시는 완성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사람은 돌아온다
산사에서 내려와
일상의 불빛 속으로 들어와
책상 앞에 앉고, 램프를 켠다

‘이제 써야 한다.’

그 순간, 시는 멀어진다

아까까지 분명히 존재하던 그 무엇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고
기억하려 할수록 더 흐릿해진다

머리를 숙이고 애를 써보지만
문장은 나오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그것은 시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시를 붙잡는 방식이 틀렸기 때문이다

산사에서의 시간은
억지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
어떤 목적을 향해 집중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흘러가게 두었고
그 흐름 속에 자신을 맡겼을 뿐이다

책상 앞에서는
그 반대로 행동한다


생각을 쥐어짜고
느낌을 끌어내려하고
없어진 것을 억지로 다시 만들려 한다

이때 시는 도망간다
시상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다


그것은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열림의 결과다


닫힌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다

이미 채워져 있는 머리
억지로 채우려는 마음
결과를 요구하는 태도 속에서는
시가 머물 자리가 없다

시상은 언제나
비어 있는 곳을 찾는다


시를 쓴다는 것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비워 두는 일에 가깝다

그날 산사에서
바위 위에 앉아 있었던 자신은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았기에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돌아와서
무언가를 하려는 순간
이미 그릇은 닫혀버린다

시를 쓴다는 것은
그 순간을 다시 만드는 일이 아니다


그 순간을 다시 ‘살아내는’ 일이다


기억하려고 애쓸수록 멀어지는 이유는
기억이 아니라
상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때의 자신은
자연과 나뉘지 않았고
시간을 붙잡으려 하지 않았으며
그저 그 안에 있었다

그 상태를 잃어버리고
결과만 가져오려 할 때
문장은 죽는다

글을 쓴다는 것은

머리를 숙이는 일이 아니다
머리를 놓는 일이다

짜내는 것이 아니라
흘려보내는 일이다

억지로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흐르고 있던 것을
조용히 받아 적는 일이다

시는 언제나
이미 와 있다

다만 그것을 알아보는 순간과
적어내는 순간이
서로 어긋나 있을 뿐이다

좋은 글은
그 간격을 줄이는 데서 시작된다

산사에서의 그 고요를
책상 위로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책상 위에서도
그 고요로 다시 들어가는 것

그것이 글을 쓰는 사람의 일이다

글이란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존재의 상태가 남긴 흔적이다

그날의 석양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아직도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처럼

그때의 시 또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아직도 안에 있다


그것을 꺼내기 위해서는
다시 조용해져야 한다
다시 앉아야 한다
다시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그저 흘러오게 두어야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흘러온 것을 거스르지 않고
조용히 옮겨 적는
겸손한 행위이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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