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못해 사는 상태, 그것이 절망이다 ㅡ키르케고르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죽지 못해 사는 상태, 그것이 절망이다





사람은 종종 말한다.
사는 것이 힘들다고.
더 깊이 들어가면, 문제는 단순한 고통이 아니다. 고통은 견딜 수 있다. 문제는 방향을 잃은 채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감각이다. 멈출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온전히 나아가고 있는 것도 아닌 상태. 바로 그 지점에서 절망은 시작된다.

쇠렌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절망을 단순한 슬픔이나 우울로 보지 않았다. 그는 절망을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는 상태’라고 보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과의 관계가 어긋난 상태다.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 살아야 하지만, 동시에 그 자신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벗어나려 하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이 모순 속에서 절망은 깊어진다.

오늘의 현대인은 이 절망을 더 은밀하게 경험한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없어 보인다. 일상이 유지되고, 관계가 이어지고, 삶은 계속된다.
그 안에서 어떤 사람들은 조용히 무너진다.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알 수 없는 감각,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는 시간. 이것이 바로 ‘죽지 못해 사는 상태’다.

이 상태는 극단적인 고통처럼 보이지 않는다. 외려 너무 익숙하고 평범하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사람은 고통이 클 때는 그것을 직면하려 한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는 듯한 공허 속에서는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게 절망은 조용히, 그러나 깊게 스며든다.

키르케고르가 말한 절망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그것은 외부의 조건이 아니라, 존재의 균열에서 비롯된다. 사람은 끊임없이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살아간다. 더 나은 모습, 더 성공한 삶, 더 인정받는 존재.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정작 ‘자기 자신’은 점점 멀어진다.

사람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세상이 요구하는 자신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느끼는 자신이다. 이 둘이 일치하지 않을 때, 인간은 내면의 긴장을 견디게 된다. 겉으로는 살아가지만, 안에서는 무너지는 상태. 이것이 절망이다.

절망은 죽음보다 더 깊다. 죽음은 끝이지만, 절망은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계속 살아가야 하는 상태 속에서 지속된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불렀다. 죽지 않기 때문에 더 고통스러운 병이다.

이 절망은 단순히 피해야 할 것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절망은 거짓된 자신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는 내면의 외침이다.

하여
중요한 것은 절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직면하는 것이다. 자신이 어디에서 어긋났는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정직하게 바라보는 것. 그때 비로소 인간은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

현대인의 절망은 소리 없이 깊어지지만, 그 회복 또한 조용히 시작된다. 거창한 변화가 아니라, 자신을 다시 인식하는 작은 순간에서 시작된다.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자리에서 다시 묻는 것.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죽지 못해 사는 상태는 분명 절망이다.
그러나 그 절망을 통과할 때, 비로소 살아가는 이유가 다시 태어난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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