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 시인의 시 《수혈》을 청람 김왕식 평하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김선영 시인 시집 《달빛 해일》과 《풀꽃 왕관》






수혈輸血




시인 김선영





새가 높이 날자
달의 이마에
날카로운 생채기

파란 달에서 떨어지는
파란 달의 피
한 방울

내가 쓰는
백지에

떨어진다

지금 창백한 나의 시에
달의 혈액이
수혈輸血되는
순간









달의 이마에 새겨진 언어
— 조탁의 극점에서 태어나는 시의 혈맥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어쩜, 이럴 수 있을까?

단, 한 글자도 빼고 보탤 수 없다.

그야말로 정제미의 극치다."


ㅡ 어느 시인이 김선영 시인의 이 시를 평한

글이다.





언어가 가장 정제된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말이 아니라 하나의 표면이 된다. 김선영 시인의 《수혈輸血》은 바로 그 표면 위에 새겨진 상처로부터 시작된다.
“달의 이마”라는 표현은 이 작품의 정점이자, 시인의 고유한 언어 감각이 도달한 자리다. 이마는 가장 드러난 곳이며, 동시에 존재의 중심이다.
그곳에 새겨진 “날카로운 생채기”는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세계가 스스로를 인식하는 순간의 흔적이다.
이 한 구절에서 이미 시는 완성에 가까운 밀도를 확보한다. 이러한 언어의 조탁彫琢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김선영 시인이 1960년대 초반 여류시인 모임인 <청미회>를 허영자 ㆍ김후란 작가 등과 결성하며 한국 문학사에서 최초의 여성 문학동인을 이끌었던 사실은, 그의 시적 자의식이 얼마나 선구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단순히 시를 쓰는 데 머물지 않고, 언어를 다루는 방식 자체를 새롭게 조직한 시인이다.

이어지는 “파란 달의 피”는 감각의 전복을 넘어선 존재의 깊이다. 피는 본래 붉다는 고정된 인식을 지니지만, 시인은 그것을 푸른색으로 치환한다.
이 전환은 시적 장치에 머물지 않는다. 세계의 표면을 벗겨내고, 그 아래 흐르는 더 깊은 층위를 드러낸다. 이때 ‘파란’이라는 색채는 차가움과 고요, 그리고 투명한 슬픔을 동시에 품는다.
김선영 시인의 언어가 지닌 특징, 곧 깊고 맑은 결이 이 한 단어에 응축되어 있다.

“툭” 떨어지는 한 방울의 순간에서 시는 다시 물성을 획득한다. 극도로 압축된 언어가 다시 구체의 자리로 내려오는 이 이동은, 시가 공중에 머물지 않고 현실의 표면에 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백지는 더 이상 빈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상처를 받아들이는 자리이며, 동시에 생명을 이식받는 몸이 된다.

마지막의 “창백한 나의 시”와 “달의 혈액”이 만나는 장면은 시 쓰기의 본질을 정면으로 드러낸다.
시는 스스로를 채우는 행위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스며드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 외부는 언제나 상처 입은 세계이며, 시인은 그 상처를 가장 정제된 언어로 옮겨 적는다. 그때 언어는 장식이 아니라 매개가 된다. 생명을 옮기는 통로가 된다.

김선영 시인의 시어 조탁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평가는 이 작품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그의 언어는 화려하지 않다. 단 한 단어도 헛되지 않다. 불필요한 것을 끝까지 덜어낸 자리에서, 외려 더 깊은 울림이 발생한다. 그것은 기술의 완성이 아니라, 오랜 시간 언어를 견디며 다듬어 온 내면의 결과다.

이 시는 하나의 진실로 수렴한다.
가장 맑은 언어는 가장 깊은 상처에서 태어난다는 것.
그리고 그 상처가 닿은 자리에서,
시는 비로소
자신의 피를 얻는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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