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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스방 May 11. 2024

내 직업은 백수

아침에 늦잠을 잤다. 

벌떡 일어나 한참을 허둥거리다가 거실 소파에 앉아 고개를 떨구고 큰 한숨을 쉬었다. 

지난밤에 잠을 못 이루며 다가오는 새벽을 피하려고 애쓰다가 겨우 잠들었는데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온 아침 햇살에 놀라 잠에서 깨었다.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 버릇처럼 몸에 밴 출근 준비를 하려다 멈칫했다. 


며칠 전에 직장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퇴직으로 실업자가 된 거짓말 같은 현실에 억울함과 분노의 마음이 가시지 않다가 새벽에 되어 겨우 잠든 탓이었다.      

비몽사몽 흐릿한 정신으로 한참을 소파에 기대어 멍하니 앉아있다가 주방에 놓인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서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켜며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진정시켰다. 


퇴직 후 며칠 동안 밤마다 가슴을 저미는 고통으로 쉽게 잠에 빠지지 못하고 겨우든 잠에서도 쫓기듯 벌떡 일어나 숨을 고르기도 했다. 

어느 날 새벽, 선잠에서 깨어 우두커니 거실 창가에 기대어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안방 침대에서 아내의 뒤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도 심란한 마음으로 잠 못 이루며 깨어있는 것 같은데 내색하지 않고 마음을 다스리며 나와 아픔을 함께하고 있는 것 같아 울컥한 생각이 들어 눈물이 핑하고 돌았다. 


그 순간 자다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면서 더 이상 무기력하게 현실을 부정하는 상념에 젖어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는 실업자다. 

실업자를 빗대서 할 일 없이 놀고만 있다고 백수라고도 하지만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직장의 울타리가 없는 신세이다. 

직장이란 울타리 안에 있을 때는 울타리의 고마움을 느끼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자의든 타의든 울타리를 넘어서 냉혹한 현실에 부딪혔을 때의 어려움은 외딴섬에 홀로 떨어진 외로움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런 상념을 뚫고...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이 말이 순간 뇌리를 스쳤다. 

현실의 고통을 지속시키는 것이나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은 오로지 나의 선택이다. 

냉혹한 찬바람을 견디고자 바람막이 옷을 걸치는 것이 나를 지키고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부터 무기력한 일상에서 탈출하여 하루하루 소중한 시간으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우선 하루의 삶을 긴장감 있게 살기 위해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매시간 했던 일을 기록하는 To DO Rist를 작성해서 나태해질 수 있는 백수 생활을 압박했다. 


어느 날 말이 좋아 재충전을 위한 방콕이지 사실상 어쩔 수 없는 백수의 나태한 칩거에서 벗어나려고 동네 뒷산에 올랐다. 

높지도 않고 험하지도 않아 아파트 울타리만 지나면 오를 수 있었던 뒷산이었다. 

그동안 마음의 여유 없이 살아온 탓인지 낯선 발걸음으로 산꼭대기에 올라 발아래 펼쳐진 동네 풍경을 보고 신선한 마음으로 심호흡을 했다.      

이리저리 한참을 서성거리다가 산 아랫마을 길을 따라 행정서류를 떼러 주민센터로 향했다. 

주민센터에서 민원신청 순서를 기다리면서 창구에 비치된 마을 사업에 대한 안내 홍보물을 보고 마을계획단이라는 단체를 알게 되었다. 


직장생활을 해오면서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잠만 자는 베드타운으로 여기며 살아왔는데 마을이란 단어가 귓속에 정겹게 꽂혔다. 

주민들이 마을에 필요한 사업을 스스로 찾아서 구청에 사업 지원을 요청하면 구청에서는 마을 사업의 타당성을 검토하고 소요예산을 마을계획단을 통해 주민들에게 지원해 주었다.      

주민들로 구성된 마을계획단은 마을을 돌아보며 주민들을 위한 편익사업을 찾아내어 사업계획에서부터 실행과 결과보고에 이르는 전 과정을 수행한다. 


마을계획단 활동에 참여하면서 마을을 돌아보다가 뒷산 중턱에 주민들을 위한 쉼터를 만들기로 사업을 계획하고 실행에 들어갔다. 

내 직업이 백수이었기에 평일 낯에 뒷산에 쉼터를 만드는 일에 쉽게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쉼터 주변에 무성한 잡초를 제거하고 벤치를 설치해 줄 일꾼들을 기다렸다.

벤치 자재를 싣고 산 아래 도착한 트럭에는 일꾼 네 명이 오기로 했던 약속과는 달리 운전사와 조수석에 딸랑 한 명만 왔다. 우리 쪽 일손이라곤 나와 연세 드신 어르신과 여성 단원 다섯이 전부였다. 

어쩔 수 없이 산 밑에서 산 중턱까지 적지 않은 무게가 나가는 벤치 자재를 등에 지고 산을 올라야 했다. 


평소에 무거운 짐을 옮길 일도 없고 고된 산행을 즐기지도 않았던 나는 어깨를 짓누르는 원목 자재가 마치 현실의 삶에서 고난과 역경에서 싸우는 것같이 느껴졌다.      

한참을 낑낑거리며 기를 쓰고 산 위로 한발 한발 발걸음을 내디뎠다.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든 발걸음으로 산 아래위를 오가며 쉼터에 벤치 설치가 마무리되니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등줄기에 흐르던 땀이 마르고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동안 머리만을 써서 일해왔던 내가 몸을 써서 남을 위해 한 일에 대한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쉼터를 만들고 벤치를 설치하는 일이 구청에서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주민들 스스로 마을의 불편한 것을 찾아서 척척 해결해 나가는 것을 보고 내심 놀라웠다. 

또한 주민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마을 일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정감 어린 마을의 참모습을 보았고 그 속에 함께 있다는 것이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마을 일에 참여하면서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동네 행정 게시판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마침 게시판에 구청 자원봉사센터에서 자원봉사 프로젝트리더단을 모집하고 있었다. 


그전에 직장에서 봉사단을 만들어서 자원봉사센터와 협력해서 봉사단을 운영해 본 경험이 있어서 반가운 마음으로 자원봉사 프로젝트리더단 모집에 지원했다. 

자원봉사 프로젝트리더단이 꾸려지고 운영과 봉사활동에 대한 워크숍이 있었다. 

자원봉사 프로젝트리더단 단원들은 대부분 그동안 꾸준하게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는 여성으로 구성되었으며 부부가 함께 참가한 젊은 목사님과 나만 남자였다.     

워크숍을 통해 목사님 부부는 물론 자원봉사 프로젝트리더단에 모인 봉사자들은 봉사의 즐거움과 보람을 삶의 일부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자원봉사 워크숍에서는 몇 가지로 봉사 분야를 나누고 구체적인 봉사활동의 지도를 그려나갔다. 

내가 속한 팀에서는 자살 예방을 위한 캠페인 봉사활동을 주제로 계획을 구체화시키는 작업을 시작했다. 

나는 예전에 두손모아봉사단을 운영하면서 보건소와 협력하여 자살예방지킴이 활동을 했었다.

주변에 자살을 예고하는 행동이나 낌새를 보이는 이웃이 있으면 보건소나 정신건강증진센터에 전문가의 도움으로 자살을 예방하는 교육을 받았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동네 철물점을 방문하여 번개탄을 사 가는 사람 중에 이상한 느낌이 있으면 해당 연락처로 알려줄 것을 당부하는 현장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자살 충동이 일어나 실행에 옮기려는 사람을 보통의 생각으로 접근하면 해결이 어려워져 전문가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이러한 자살 예방 봉사활동 경험을 기초로 자원봉사 프로젝트리더단에서 꾸려진 팀에서 총무 역할을 하면서 캠페인성 자살 예방 프로젝트를 함께했다. 

여러 차례의 토의와 숙의 과정을 통해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버스 정류장에 자살 예방에 대한 글을 게시해서 평소에 자살 예방에 대한 주민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캠페인 봉사활동을 진행했다. 

이러한 봉사활동을 통해 그동안 직장생활에서 알 수 없었던 세상 속 이야기를 접하며 생각의 폭을 넓혀 갈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 이러한 봉사활동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가장으로서 경제적인 활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행인 것인지 비자발적인 퇴직으로 고용보험에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되었다. 


실업급여를 신청하려고 고용복지센터로 갔다. 

고용복지센터 창구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순번 대기표를 빼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표를 뽑아서 구석진 자리를 찾아 앉아 주변을 살펴보았다.      

머리가 희끗한 내 나이 또래의 중년들 사이로 젊은이들의 모습이 더 많아 보였다. 

어떤 중년의 실업자는 지나온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듯이 눈을 감고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그 틈에서 푸념 어린 상념에 젖어 새삼 가장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한 가정을 지탱하고 있는 가장의 실직은 그  가족들의 삶의 질을 차가운 바닥으로 함께 내동댕이쳐진다. 

실업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하게 일자리를 잃었다는 사실에서 한 걸음 더 나가서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가 더해져 무기력한 삶으로 치닫게 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실직을 당하면 건강하던 사람도 갑자기 몸에 맥이 풀리고 어깨가 축 늘어진 모습들로 묘사되어 그 고통을 어림짐작하게 한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이나 조금 낮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도 원치 않은 실직을 당하면 그 애달픈 심정은 대체로 비슷했다. 


실업급여를 신청하러 온 사람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직장에서 매달 받았던 월급이 끊어진 아픔보다 상심하고 허탈해진 마음을 위로받고자 하는 애절한 모습이 역력했다.      

나만의 생각으로 한참을 헤매고 있는데 ‘띵동’ 소리와 함께 내 손에 쥔 번호가 떴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얼른 상담 창구로 향했다. 

기다린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짧은 시간에 실업급여 수급대상 여부의 확인과 실업급여 신청 교육 안내를 듣고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한동안 내가 사는 동네를 새로 익히며 세상 사는 즐거움을 맛보고 봉사활동을 통해 삶의 가치를 찾아가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늘 애잔한 먹먹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속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날 봐주고 있던 아내와 함께 기분전환도 할 겸 해서 아파트 뒷산을 올랐다. 

산허리를 돌아 마을계획단 단원들과 함께 만든 쉼터에 이르러 나의 땀 냄새가 배어 있는 벤치에 앉았다. 

아내에게 쉼터를 만들었던 그날의 고생담을 마치 무용담처럼 자랑스럽게 떠들어댔다. 

아내는 대단하지도 않은 나의 무용담을 끝까지 들으며 내 팔에 팔짱을 끼었다.      


얼마 전까지 퇴직 후 잠 못 이루며 밤을 지새웠던 괴로움에서 벗어나 새 희망을 발견한 듯 즐거워하는 내 모습에 내심 안도하는 아내의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꾸어줄지언정 꾸임 받지 말자’

여유롭지 못했던 나의 어린 시절을 지나며 만들어진 어릴 적 소신이 내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어려움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고 내가 걸어가는 길에 늘 만날 수 있는 보통의 일이라 여길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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