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 가까울수록 더 어둡다고 하지만 어느새 어둠을 뚫고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지난밤 칠흑 같은 어두움 속으로 깊어가는 밤을 지새우며 조합원들 앞에서 당당하게 외칠 정견발표를 되새기며 선잠이 들어 아침을 맞았다.
총회 선거 장소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지나온 시간을 회상하며 굳은 결의로 승리를 다짐했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이 지났는데도 총회 장소인 문화예술회관에 들어서니 찬 바람이 스며들어서 그런지 실내공기가 쌀쌀했다.
총회가 시작되려면 두어 시간 남짓 있어야 하는데도 벌써 온 조합원들이 군데군데 모여 있었다.
낯익은 얼굴의 조합원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텅 빈 객석에 앉아 정견발표를 할 무대 위를 바라보며 정견발표문을 되뇌며 다가오는 시간을 기다렸다.
급하게 시간이 흐른 듯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커지고 순식간에 좌석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와보니 총회 참석 조합원들이 접수대에서부터 외부 출입문 밖에까지 줄지어서 총회장 입장 절차를 밟고 있었다.
조합원들의 총회 참석 열기가 대단함을 느끼고 입후보자 대기 장소로 돌아가려는데 조합원 한 분이 지금 이곳 총회 장소에서 떠돌아다니는 말이라며 전해주었다.
말인즉, 누군가 나의 후보 기호를 지칭하면서 기호 3번은 직원일 때 회계사고를 내고 신협에서 쫓겨났다는 말을 퍼뜨리고 있다며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느냐며 재촉했다.
선거운동 기간에도 비슷한 내용을 조합원들이 나에게 알려주었지만 사실무근이라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선거 당일에도 누군가 거짓 소문을 남발하고 있었다. 상황의 심각성으로 볼 때 내 차례의 정견발표 때 거짓 소문의 진상을 밝혀야 된다는 생각에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거짓 소문의 해명을 위해 3분뿐인 정견발표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심려를 다해 준비했던 이사장 출마 정견을 소신껏 외쳐댔다.
내가 정견발표를 하는 중간중간에 박수가 이어지더니 마지막에 맺음말로 마무리했을 때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쏟아졌다. 그 순간 투표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결전의 투표를 앞두고 선거 결과에 대한 좋은 느낌이 들어 마음이 편안해졌다.
투표가 시작되고 대 여섯 시간이 지나서 투표시간 종료를 앞두고 뛰어 들어오는 두 명의 조합원을 끝으로 출입문이 닫히고 개표 준비가 시작되었다.
나는 다른 후보자들과 나란히 대기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대기석에 앉아서 주위를 둘러보니 개표상황을 지켜보려고 조합원들과 각 후보의 지지자들이 듬성듬성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내 지지자들 사이로 객석 한쪽 편에 앉은 아내와 아이들은 초조한 눈빛으로 개표가 진행되는 무대 위를 지켜보면서 긴장하고 있었다.
선거관리위원장의 투표 종료 선언에 이어 개표가 시작되고 무대 위에서 개표 종사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었다.
그동안 선거운동으로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 보니 제아무리 천하장사도 무거운 눈꺼풀은 이길 수 없다고 하듯이 투표 결과를 앞에 놓고 긴장 속에 잠시 눈을 감았는데 그만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웅성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무대 위를 올려다보니 이사장에 출마한 네 명 후보의 투표용지가 후보별로 네 개의 뭉치로 분류되어 무대 위에 사람들 사이로 언뜻언뜻 보였다.
객석에 있던 사람들이 투표용지의 높이를 대강 눈대중으로 보면서 소곤소곤 거리며 무대 위에 후보별 선거 참관인들의 표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후보자 대기석에 다가와서 옆에 앉은 후보자에게 어림잡아 나와한 후보의 투표용지의 높이가 비슷해 보이고 다른 두 후보의 투표용지는 다소 낮아 보인다고 귓속말로 소곤댔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무대 위의 개표 현장을 지켜보며 피를 말리는 듯한 극도의 긴장감에 휩싸여 투표용지 집계에 들어갔다. 집계가 마무리되면서 높이가 다소 낮았던 두 후보를 제외하고 나와한 후보의 투표용지 매수를 선거 참관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득표수를 재차 검표하는 확인 과정을 몇 차례 반복했다.
드디어 선거 참관인들의 최종 확인을 거쳐 개표를 마무리하고 결과를 알리기 위해 선거관리위원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엄습한 긴장감으로 숨죽이듯 조용한 분위기를 뚫고 문화예술회관 기둥에 매달린 커다란 스피커를 통해
“기호 3번 민병규 후보가 이사장에 당선되었음을 선포합니다.” ‘탕탕탕’
선거관리위원장의 근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사장 당선 확정을 알리는 의사봉 소리에 앞서 후보별 득표수를 발표했을 때 귀를 의심할 정도로 간발의 득표 차이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겸손하게 제 할 일을 다 하라는 조합원들의 표심이 숨어 있음을 느끼며 이사장 선거를 준비하면서 마음속에 간직한 괴테의 명언이 떠올랐다.
『목표에 다가갈수록 고난은 더욱 커진다. 처음에는 깨닫지 못했던 여러 문제가 선명하게 보이는 때, 이때가 바로 목표가 현실로 다가오는 시기이다. 성취라는 것은 우리 곁으로 가까이 올수록 더 큰 고난을 숨기고 있다.』
괴테의 이 말을 가슴 깊이 새기며 겸손의 지혜로 이사장으로서 올바르게 해야 할 일을 마음속으로 묵상하면서 어려움 속에 주어진 새날을 올바르게 걸어갈 것을 다짐했다.
지난날의 손때가 묻어 있던 내직장 신협을 2년 가까이 내쫓겨서 떠나 있다가 이제 조합원들의 축하를 받으며 다시 돌아오게 되었으니 말 그대로 감개무량했다.
‘기사회생’이라는 거창한 비유가 아니더라도 죽을 만큼 힘든 고통을 이겨내고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된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본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우선 선거공약의 슬로건이었던 조합원 중심의 열린 경영을 실천하기 위해 이사회를 통해 “조합원섬김팀”이란 직제를 신설했다.
조금은 직설적인 표현이지만 지역의 주민인 조합원을 기반으로 운영되는 신협의 특성상 조합원을 섬기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때로는 그 중요성을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신협의 임직원이 조합원을 섬기는 마음은 언제나 진솔하게 늘 곁에 두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조합원과 관계된 모든 일을 담당하는 독자적인 부서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조합원들과 함께 떠나는 테마여행으로 기쁨을 나누고 조합원과 함께 삶의 보람을 찾아가는 봉사활동에 이르기까지 조합원과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는 진솔함을 담아내고자 했다.
이사장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 임직원들의 직장에 대한 성숙한 마음을 다지기 위해 '더 멋진 신협을 만들기 위한 임직원 워크숍'을 가졌다.
직장 내 부서들의 사업계획과 성과에 대한 발표와 토론이 이어지고 나의 특강 순서가 되어 '보람과 가치가 넘치는 일터를 함께 만들자'라는 주제로 직원들과 함께 생각하는 메시지를 던졌다.
여기에 더해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변화는 서서히 만 오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급격하게 찾아올 수 있기에 변화라는 화두를 꺼내었다.
환경변화에 대한 준비를 잘해나가야 하기 때문에 자기가 사는 환경에 따라 몸 크기가 달라지는 신기한 물고기 코이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했다.
코이는 어항에서 기르면 금붕어 크기만큼만 자라지만, 커다란 수족관이나 연못에서는 25cm까지 자라고 큰 강물에서 자라면 1m 이상의 대어로 성장한다.
코이라는 물고기가 생활하는 환경에 따라 크기가 달라지듯 사람 또한 주변 환경과 자신의 갖고 있는 생각의 크기에 따라 발휘할 수 있는 능력과 꿈의 크기가 달라진다는 것을 강조했다.
덧붙여서 문화가 행동을 지배한다는 생각에서 임직원들의 개성과 특성을 서로 인정하고 서로 신뢰하는 마음으로 우리들 스스로 올바른 조직문화를 만들어 갈 것을 당부했다.
조직문화를 서로 공감하기 위해서는 직원과 임원이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존중하고 일에 대한 자긍심을 갖고 동료들 간에 즐거움이 쌓여간다면 훌륭한 일터의 조직문화가 형성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나는 이렇게 조합원 중심의 열린 경영을 실천하면서 지역사회 공헌 활동으로 범위를 넓히면서 한발 한발 디뎌나가고 있다.
이제 다시 돌아온 직장의 건실한 경영을 책임질 이사장으로서 직원들과의 진솔한 관계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것이기에 말로 전하지 못한 이야기는 그때그때 글로써 생각을 전했다.
새벽이 가까울수록 어두움은 더 짙어지듯이 내 삶의 시련과 고통을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시련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내일을 준비했던 값진 경험으로 어두움을 뚫고 새 아침을 맞았다.
다시 찾은 좋은 기회를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을 만들어 가는 행복한 고민을 가슴 깊이 새기며 오늘 그리고 내일을 향해 뚜벅뚜벅 힘차게 걸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