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버스터미널의 화장실은 퀴퀴한 습기와 소독약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혜나가 건네주었던 짝퉁 샤넬 선글라스는 이제 정숙의 초점 없는 눈을 가려주는 서늘한 가면이 되어 있었다. 체크무늬 남방에, 임신 초기 유리코가 사주었던 헐거운 면바지, 그리고 흙먼지 묻은 운동화. 정숙은 장애인용 칸 변기 위에 망령처럼 앉아 있었다. 핏기가 완전히 가셔 창백한 얼굴에는 슬픔도, 기쁨도, 그 어떤 안타까움도 박제되지 않은 채 무심한 평온만이 감돌았다.
그녀는 감정이 소거된 표정으로 품 안의 핏덩이에게 젖을 물렸다. 눈도 뜨지 못한 갓난아이는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빈 젖을 빨아댔지만, 정숙의 메마른 몸 어디에서도 아이를 채울 양분은 나오지 않았다. 아기는 보채지도 못한 채 그저 가냘픈 신음만을 뱉어낼 뿐이었다.
그때, 화장실 문이 열리며 유모차 바퀴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정막을 깼다. 곧이어 부산스러운 기척이 한동안 이어지더니, 잠시 후 한 여자의 명랑한 목소리가 칸막이를 넘어왔다.
“아이구, 우리 공주님. 많이도 쌌어요? 엘레벌레 까꿍~. 엄마 여기 있어요. 할머니 집에 갈꺼에요~”
기저귀 교환대에서 들려오는 젊은 여자의 흥얼거림과 아기의 옹알이. 저 너머의 평범하고 따스한 일상은 정숙에게 마치 다른 세계의 기괴한 소음처럼 이질적으로 들렸다. 정숙은 그 소리를 멍하니 듣다가 유리코가 준 스웨터로 싸맨 제 아이를 슬쩍 들춰보았다. 기저귀조차 없어 발개 벗겨진 아이는 먹은 게 없어서인지 그저 물 같은 소변을 조금 지려 스웨터를 살짝 적셨을 뿐이었다. 정숙은 아이를 다시 단단히 싸매고 옷매무새를 추스른 뒤, 변기 문을 왈칵 열고 나갔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여자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여자는 잠시 정숙을 바라보았으나, 선글라스 너머로 비치는 핏기 없는 얼굴과 굳어있는 정숙의 비정상적인 낌새에 본능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여자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제 아기를 어루만지며 서둘러 기저귀를 갈기 시작했다.
정숙은 그 옆으로 바싹 다가가 가만히 섰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여자가 기저귀를 채우는 모습을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여자는 정숙의 시선이 견디기 힘든 듯 안절부절못하다가, 어색함을 깨려 겨우 입을 뗐다.
“어머…… 갓...갓난쟁이네요. 금방 끝나요.”
여자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지만, 정숙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저 우두커니 서서 여자를 응시할 뿐. 반응 없는 정숙의 태도에 여자의 손놀림은 비정상적으로 급해졌다.
이윽고 정숙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는 품 안의 아이를 세면대 옆 빈 공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더니, 거침없는 손길로 여자의 유모차 바구니에 담긴 기저귀 가방을 열었다.
“어머! 어머머!”
“왜, 왜 이러세요!”
여자가 기겁하며 제 아이를 지키듯 품에 감싸 안았다. 하지만 정숙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방 속을 뒤졌다. 분유통, 젖병, 보온병, 기저귀, 물티슈, 아기옷……. 그녀의 손은 당연하다는 듯 망설임이 없었다. 정숙은 가방 속에 있던 여자의 지갑은 필요 없다는 듯 꺼내 유모차 위에 무심하게 던져 놓았다.
그녀는 아기 용품이 담긴 가방을 제 어깨에 걸치고, 세면대 위에 두었던 아이를 다시 안아 들었다. 단 한 마디의 양해도, 사과도 없었다. 정숙은 그대로 화장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여자는 잠시 놀라 굳어 있다가, 뒤늦게 상황이 인식된 듯 화장실 밖으로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정숙은 이미 저만치 인파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아이를 안고, 타인의 가방을 멘 채, 그녀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잔뜩 놀란 여자는 남자 화장실로 들어가려던 한 남자를 붙잡고 일어난 일을 횡설수설 설명했다. 남자는 당황한 기색으로 여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으나, 이미 정숙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름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8월의 오전 7시였지만, 정숙은 지독한 오한을 느낀 듯 턱을 이따금씩 덜덜 떨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부산 노포행 시외버스에 몸을 실은 그녀는 창가 자리에 앉아 품 안의 아이를 내려다보며 빼앗듯 가져온 가방을 열었다. 젖병 안에는 반쯤 남은 미지근한 분유가 담겨 있었다. 정숙은 젖병 꼭지를 제 입술에 대고 맛을 본 뒤, 갓난쟁이의 입에 물려주었다.
버스는 천천히 육중한 몸을 일으키며 터미널을 빠져나갔다. 연약하고 작은 핏덩이는 본능적으로 젖병을 힘차게 빨기 시작했다. 정숙이 차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자, 이른 아침의 푸석한 햇살과 깨어나는 도시의 풍경이 선글라스 위를 가차 없이 스쳐 지나갔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이 눈부실수록, 정숙의 머릿속은 그날 밤의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깊게 침잠했다.
화상 자국이 흉측하게 자리 잡았던 남자의 거친 손길, 짐짝처럼 던져지듯 실렸던 봉고차의 퀴퀴한 시트 냄새. 차창 밖으로 무심히 스쳐 지나가던 불빛들 사이로 유독 선명하게 남은 조각들이 있었다. 비릿한 갯내음이 섞여 들 무렵 나타났던 '다대포'라는 네온 간판들.
그리고 얼마지 않아 막다른 길처럼 나타났던 그곳.
'영일공조’
파랗게 빛이 바랜 채 흉물스럽게 매달려 있던 그 간판.
"다대포... 영일공조... 다대포... 영일공조..."
정숙은 아이의 젖병을 매만지며 입술 속으로 낮게 뇌었다. 손끝은 이따금 떨렸지만, 선글라스 너머의 시선은 한 곳에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무언가를 보고 있는 눈이 아니었다. 열병에 뜬 채로 오직 하나의 목적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초점 없는 응시였다.
정숙은 그저 주문을 외듯 그 이름을 되풀이하며, 기억 속에 남은 비릿한 바다 냄새를 쫓아 남쪽으로, 더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