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아가리

#55

by 삼류작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혼절해 있던 정숙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초점이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8개월 전, 자신이 처참하게 짐을 싸서 쫓겨나듯 떠났던 바로 그 방이었다.

방 안은 엉망이었다. 땟자국 가득한 이불과 헤집어진 서랍장, 그리고 코끝을 찌르는 비린내와 소주 냄새. 눈물 자국이 말라붙어 뻣뻣해진 얼굴로 정숙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주인집 여자가 있었다. 정숙의 기억 속 주인집 아주머니는 언제나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염색하고 성격 또한 깐깐하고 조심스러웠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불과 8개월 만에 마주한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흰 머리칼이 반을 차지한 채 부스스하게 흐트러졌고, 매끈하던 얼굴은 꾀죄죄하게 변해 있었다. 실성한 노파는 방구석에서 아이 하나를 품에 안고 자장가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기괴하고도 평온한 그 뒷모습을 보던 정숙의 귀에, 반대편 바닥에서 들려오는 가냘픈 신음이 꽂혔다. 고개를 돌리자, 또 다른 아기 하나가 핏덩이 상태로 차가운 장판 위에 누워 간신히 울음을 뱉어내고 있었다.

정숙은 천장을 향해 시선을 던지며 흩어진 정신을 가누려 애썼다. 찢어질 듯한 하복부의 통증을 누르며 억지로 숨을 골랐다.


“아주머니…… 아기…… 아기 저한테 주세요. 아주머니…….”


목소리는 젖은 모래처럼 갈라져 나왔다. 눈가가 다시 뜨거워지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그러나 노파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기를 더욱 세게 보듬으며 중얼거렸다.


“우리 동구…… 엄마 보러 왔어요. 아이고 예뻐라…….”


“아주머니…… 제발요…… 아주머니…….”


정숙의 애절한 부름에 그제야 노파가 고개를 돌렸다. 정숙과 눈이 마주친 노파의 얼굴에 못마땅하다는 듯 깊은 미간 주름이 잡혔다. 그녀는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정숙을 쏘아보았다.


“내 아기예요. 우리 동구라고!”


노파는 낡은 수건에 싸인 아기를 마치 빼앗기기라도 할 것처럼 품에 꼭 끼고는, 눈치를 보며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아주머니! 아주머니……!”


정숙은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손끝 하나 닿지 못한 채 노파는 방 밖으로 사라졌다.

텅 빈 방 안.

정숙의 왼편에는 갓 태어난 또 다른 아기가 버려진 것처럼 바닥에서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정숙은 짐승처럼 바닥을 기어 아기에게 다가갔다. 차가워진 아기를 품에 안고 눅눅한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주었다. 아기의 작은 온기가 살에 닿자 참았던 통증과 서러움이 통곡이 되어 터져 나왔다.


“아가야…… 잠깐만…… 미안해…… 미안해…….”


정숙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아기를 추슬러 놓고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노파가 데려간 또 다른 아이를 찾아야 했다.

산통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하복부를 부여잡고, 정숙은 짐승처럼 바닥을 기어 방을 나섰다. 방 밖으로 나오자 서늘한 새벽 공기가 피부에 닿자,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뼈마디가 비명을 지르듯 시려 왔다.

정숙은 한 걸음 떼는 것조차 버거워 벽을 짚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시야가 자꾸만 번지고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노파가 데려간 아이를 찾아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안채를 향해 발을 뗐다. 텅 빈 마당을 가로질러 주인집 툇마루에 간신히 걸터앉은 그녀가 갈라진 목소리로 안쪽을 불렀다.

멀리서 동네 개들이 짖는 소리가 안개처럼 낮게 깔려 적막을 메우고 있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


대답은 없었다. 정숙은 떨리는 손을 뻗어 안쪽이 들여다보이는, 반쯤 열린 노파의 방문을 열려했다. 바로 그 순간, 멀리서 들리던 개 짖는 소리가 대문 바로 앞에서 고요를 찢어발기듯 사납게 터져 나왔다. 그 날카로운 소리에 정숙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뒤이어 들려온 것은 주인집 노파의 해맑고도 기괴한 음성이었다.


“동구야, 잘 갔다 와! 엄마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정숙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공포가 서렸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본능적인 감각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정숙은 한쪽 신발만 간신히 꿰찬 채, 피가 섞인 양수가 다리를 타고 흐르는 것도 잊고 대문을 향해 필사적으로 몸을 던졌다.


“아주머니!”


거칠게 대문을 젖히자, 그곳엔 실성한 노파가 홀가분한 얼굴로 서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품은 비어 있었다. 노파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숙의 시선이 노파의 등 뒤로 향했다. 동네를 떠도는 누런 개 두 마리가 새벽안갯속에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그중 한 마리가 아기를 감싸고 있던 피 묻은 수건을 입에 문 채, 정숙을 서늘하게 노려보았다. 나머지 한 마리는 무언가 흥미를 잃은 듯 멀찌감치 달아나고 있었다.

개와 눈이 마주친 순간, 정숙의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목구멍 속에서 굳어버렸다. 허망한 눈물이 차올라 시야를 가렸다. 개는 정숙의 절망을 비웃듯 입에 문 수건을 끌며 다른 개를 따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주머니…… 우리 아기, 아기 어딨어요? 어딨냐고요!”


정숙은 노파의 멱살을 움켜쥐고 오열하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노파는 그저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동구 출근했어. 방금 버스 타고 나갔는걸? 쟤 봐, 쟤가 가방 들고 가잖아.”


노파는 개가 사라진 방향을 가리키며 천진하게 웃었다. 정숙은 무너져 내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노파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아주머니…… 제발요…… 아주머니…….”


애끓는 통곡에 노파는 돌연 인상을 싹 바꾸며 정숙을 거칠게 뿌리쳤다.


“에잇, 재수 없게 왜 이래! 남의 아들 출근길 망치려고!”


노파는 퉤 하고 침을 뱉고는 집 안으로 쌩하니 들어가 버렸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주저앉은 정숙의 위로 새벽빛이 창백하게 내리쬐었다. 자식의 흔적마저 사라진 그 자리에서 정숙은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울었다.


눈을 번들거리며 자신을 내치던 상훈,

생글생글 웃으며 미쳐버린 주인집 여자,

그리고 핏자국이 선연한 수건을 물고 사라진 떠돌이 개까지.

그토록 그리워하며 돌아온 집이었으나, 이곳에 그녀를 반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지독한 절망만이 아가리를 벌린 채 기다리는 지옥일 뿐이었다.


극한의 절망 속에서 문득,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숙은 홀린 듯 자신의 왼손 약지를 내려다보았다.

순간, 렌조의 집 마당 낡은 CD 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던 '행복의 나라로'가 환청처럼 귓가를 스쳤다. 따스한 오후의 햇살이 내리쬐던 툇마루, 투박한 손으로 정성껏 사과를 깎아 접시에 담던 그 남자. 눈이 마주치자 쑥스러운 듯 무심하게 사과 접시를 제 쪽으로 밀어 놓던 그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스쳐 지나갔다.

정숙은 이를 악물고 부서질 듯한 몸을 이끌고 방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차가운 물에 수건을 적셔 다리를 타고 흐른 피와 양수를 닦아냈다. 살을 에는 통증이 하복부를 쥐어짰지만, 그녀는 신음조차 삼키며 이를 악물고 견뎠다.

가방에서 꺼낸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던 정숙의 손길이 문득 멈췄다. 머릿속에 번뜩이는 기억 하나가 스쳤다. 집으로 오던 택시 안, 혜나에게 받은 돈 봉투 속에 렌조가 끼워준 반지를 빼서 넣어두었었다. 정숙은 다급하게 가방 안을 다시 뒤졌지만 봉투는 없다.

그렇다 한들 그녀에게 그 무엇도 무너질 여유가 되지 못했다. 핏기 없는 그녀의 손끝이 자꾸만 잘게 떨려왔다. 제대로 된 처치 없이 방치된 산실의 냉기가 혈관 속으로 독처럼 퍼지는 듯, 몸 안쪽에서부터 기분 나쁜 오한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정숙은 떨리는 손으로 가방 구석을 다시 거칠게 뒤적였다. 그러다 다행히도 뭉개진 옷가지 사이에서 만 원짜리 몇 장과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이 겹쳐 접힌 것을 간신히 찾아내고는 그 지폐들을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었다.

그녀는 더러운 이불에 싸여 있던 아이의 숨을 다시 확인했다. 미약하지만 규칙적인 박동. 정숙은 가방 속에서 유리코에게 받았던 도톰한 스웨터를 꺼내 찢어 아이를 감싸 안았다.


‘미안해..’


정숙은 아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곳에선 그 어떤 희망도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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