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난

#54

by 삼류작자

상훈은 입안 가득 밥을 문 채 툇마루를 박차고 맨발로 뛰쳐나갔다. 입가에 번진 김칫국물이 그의 망가진 몰골을 더했다. 대문을 거칠게 젖히는 순간, 녹색 철제문 밖에 선 정숙이 시야에 박혔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분칠한 얼굴, 또렷하게 그린 눈썹, 붉은 입술.

팔아넘기던 그날 이후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다. 아니, 죽어버린 셈 쳤다. 그런데 지금, 잔뜩 부른 배를 끌어안고 제 발로 돌아와 서 있다. 치마단 아래로는 투명한 양수가 흘러내려 그녀의 발목을 적셨다.


“……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숙의 허리가 꺾이듯 숙여졌다. 날카로운 숨소리가 단절되듯 터져 나왔다.


“하—윽……”


뒤따라 나온 노파가 그 옆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어이구! 애기 나오나 봐! 애기 나온다! 애기, 애기! 우리 아기 나온다.”


실성한 노파는 박수를 치며 빙글빙글 돌았다. 상황의 무게와는 동떨어진, 기괴한 축제 같은 흥분이었다. 정숙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상훈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했다. 입가에 묻은 김칫국물, 붕대로 감싼 한쪽 눈, 헝클어진 머리칼과 지독한 술 냄새.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눌러두었던 기억이 파편처럼 솟구쳤다.


국밥집. 손목을 거칠게 잡아끌던 손. 눈을 희번덕거리며 고함치던 모습.

“니 옷만 넣으라고.”

화상 입은 남자의 일그러진 얼굴과 자신을 외면하던 상훈의 표정.

정숙의 숨이 멎는 듯 멈췄다.


“아니야… 아니야…”


세상에 단 하나 기대고 믿었던 상훈에게 당한 배신이 너무도 깊어 외면하듯 스스로 지워버렸던 기억이었다. 그것이 상훈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날 밤의 냄새, 손의 감촉, 문 닫히던 소리까지. 눈물이 둑이 터진 듯 쏟아졌다.


“흐—윽… 아냐… 아냐…”


상훈을 거부하듯 고개를 젓는 사이, 또 한 번의 진통이 밀려왔다. 배가 단단하게 굳으며 다리가 휘청거렸다. 상훈이 본능적으로 팔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다. 그는 입안의 밥을 거칠게 씹어 삼키고는 손등으로 입가를 쓱 문질러 닦았다.


“야, 이 씨… 일단 들어가자.”


그의 손이 그녀를 부축했지만, 정숙은 떠오른 기억에 필사적으로 상훈을 거부하듯 몸을 빼려 했다. 그러나 밀려드는 진통 앞에서 저항은 무력했다. 노파는 정신없이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아기 나온다니까! 수건 가져와야지! 물도 끓여야지! 아이고, 우리 집에 애기 태어나네! 경사 났네, 경사 났어~~”


상훈은 이를 악물었다.


“시끄러워 좀, 씨발!”


그는 억지로 정숙의 팔을 어깨에 걸치듯 끌어올렸다. 가방을 쥔 그녀의 손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걷는다. 넘어지지 말고.”


정숙은 대답 대신 신음을 토했다. 두 사람은 비틀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헤집어진 서랍장, 구석에 밀린 이불, 퀴퀴한 곰팡이내.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은 공간이었다. 상훈은 이불을 발로 차 대충 펼치고 그녀를 눕혔다. 진통이 악을 쓰듯 밀려왔다. 정숙의 등이 활처럼 젖혀졌고, 치마 아래로 번진 양수가 바닥까지 스며들었다.

상훈은 그제야 예상치 않은 그녀의 등장, 거기에 더해 곧 출산이라도 하려는 듯진통을 괴로워하는 정숙을 현실감 없는 눈으로 멍하게 내려다보았다.

이내 머릿속에선 저열한 생각이 스쳤다. 저 뱃속에 아이는 제 자식일 거란 확신은 있었지만, 분명 온갖 남자들과 굴러먹다 왔을 거란 생각이 들자 순간 그녀의 모습에서 말로 설명하기 힘든 불결함이 느껴진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런 생각과 함께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그의 손은 허공에서 어색하게 멈춰 섰다. 노파는 문턱에 버티고 서서 아이처럼 손뼉을 쳤다.


“아이고 예뻐라, 우리 아기…… 동구야, 엄마가 봐줄게. 엄마가 다 해줄게.”


노파의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기괴한 배경음악처럼 방 안을 채웠다. 그제야 상훈은 정신이 번쩍 드는 듯 턱 근육을 딱딱하게 굳혔다.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모를 난감함이 분노를 앞질러 치밀었다. 그는 노파를 향해 왈칵 고함을 질렀다.


“아, 씨발! 좀 가만히 좀 있어요! 정신 사나워 죽겠네!”


상훈의 서슬 퍼런 고함에도 노파는 해맑게 웃으며 죽은 아들을 부르는 듯한 웅얼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정숙은 극심한 진통에 눈을 질끈 감았다. 통증이 골반을 부술 듯 밀려올 때마다 상훈의 얼굴 위로 배신의 기억이 겹쳐졌다. 그녀는 상훈을 노려보며 갈라진 목소리를 뱉었다.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오빠…… 나한테 왜 그랬어…….”


증오와 원망이 뒤섞인 말이 박혀들자 상훈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정숙은 악착같이 그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오빠가…… 어떻게 나한테…….”


그녀의 눈에서 흐르는 것은 눈물이 아니라 피고름 같은 원망이었다. 비난의 화살이 날카롭게 박힐수록 상훈의 안면 근육이 미세하게 떨렸다. 수치심을 가리려는 비겁함이 이내 폭발하듯 튀어나왔다


“어디서 굴러먹다 와서…… 뭐? 뭐라고? 씨발, 입 안 닥쳐?”


상훈은 주머니에서 구겨진 담배를 꺼내 물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정숙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라이터를 켜자, 독한 담배 연기가 방 안의 눅눅한 공기 속으로 번져 나갔다. 정숙이 다시 한번 비명을 질렀다.


“사람이…… 어떻게 그래…….”


진통에 까무러칠 듯 몸이 꺾였다. 상훈은 시선을 거두고 다시 한 모금 깊게 연기를 빨아들였다.


“씨발…….”


그는 중얼거리며 모든 상황을 외면하듯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방 안에는 노파의 웃음소리, 정숙의 거친 숨, 고통에 찢어지는 비명이 뒤엉켜 울렸다. 마당으로 나온 상훈은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빨았다. 방 안에서 새어 나오는 처절한 산통은 마치 자신을 향한 비난처럼 귓전을 때렸다.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털던 그의 시선이 바닥에 멈췄다. 방문 앞에 정숙이 가져온 가방이 놓여 있었다. 상훈은 홀린 듯 다가가 쭈그려 앉았다. 가방 속을 거칠게 뒤적거리던 그의 손에 빳빳하고 묵직한 돈 봉투가 잡혔다. 봉투를 집어 든 상훈이 방 안쪽을 바라보았다. 한쪽뿐인 그의 눈동자가 기괴하게 번들거렸다. 돈의 출처는 뻔했다. 몸을 팔아 만든 돈이라는 확신이 들자 역겨움이 치밀었다.


“더러운 년.”


상훈은 낮게 짓씹으며 담배를 짓이겨 껐다. 그는 돈 봉투를 품속에 챙겨 넣고는 미련 없이 대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얼마 후, 방 안에서 날카로운 아기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숙의 마지막 비명과 같은 소리가 이어졌고 곧이어 또 한 번의 울음소리가 겹쳐 들렸다. 여자아이 하나가 태어났고, 연이어 남자아이 하나가 태어났다. 쌍둥이였다. 정숙은 혼절한 듯 악쓰던 소리는 멈췄고, 오직 실성한 노파의 흥얼거림과 갓 태어난 두 아이의 울음소리만이 서늘한 적막을 뚫고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우리 동구…… 엄마한테 왔어. 동구야. 엄마야, 엄마.”








어찌 최근 들어 뭔가를 쓸만한 상황들만 있는 게 아니라 연재가 제멋대로입니다.

다음화 역시 집중력이 좀 올라올 때 쓰게 될 것 같습니다. (_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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