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슈만과슈테판 }

(이유 있는 반전, 생각 없는 진실3)음악이 말을 걸기 시작한 순간

by 이정민 Ophelia


* 프롤로그


밤이 깊어질수록 마음은 작아져 가고…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감정은

마음을 대신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결국 음악으로 나를 채운다.


피아노 앞…

어디선가 머물고 있던 음 하나에

시선이 꽂힐 때면

어느새 애기들은 내 곁에 다가와 있었다.


말은 없지만,

건네는 눈빛으로,

다정한 꼬리와 설레는 온기로…


그들은

마치 AI기능을 탑재한 듯(?)

언제나 나보다 먼저

내가 어떠한지를 알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새벽이니

자연스레 떠올려지는 한 곡.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 보칼리제

(Vocalise, Op.34 No.14)

이 곡은 말이 없는 노래에요.

1912년에 발표한 14곡의 로맨스 중,

유일하게 가사가 없는 작품이고요.


하지만 그 어떤 가사보다

아름다운 말을 품은 음악.


찬란한데 슬픈,

새벽의 내 마음 같기도

… 바흐 같기도 한 곡.


이런 곡은 어떻게 쓰나 했었는데…



1. 슈만, 말보다 음악이 먼저였던 사람


Robert Schumann (1810 – 1856)

- 요제프 크리허버 석판화 (1839)



로베르트 슈만은

늘 말보다 음악이 먼저였다고 고백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말보다 먼저 떠오르는 선율,

언어로는 담기지 않는 감정을 대신하던 음악.


그래서였을까요.

그는 특히 예술가곡 Lieder을 많이 작곡했지요.



물론 ‘가곡의 아버지’라 하면 슈베르트가 먼저 떠오르지만,

슈만은 그 가곡을 감정의 심연까지 끌어올린 시인 같은

작곡가였습니다.


‘리트(Lied, 예술가곡)‘는

그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감정의 표현이었고,

음표 하나하나가

그의 깊은 마음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주었어요.


그러나 이런 슈만에게도

때로는 음악이 말을 잃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Speechless..


마음이 불타오르는데, 악상은 떠오르지 않을 때.

생각은 많은데, 손이 따라주지 않을 때.

그럴 땐 슈만은 조용히 곁을 바라봅니다.

그때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주던 한 존재.

슈테판(Stephan).


슈테판의 품종은 기록마다 다르게 전해집니다.

이 그림은 후대에 전해진 모습으로, 조용히 그의 곁을 지켰던 ‘그 마음’을 대신 전하고자 실었습니다.



2. 슈테판, 가장 조용한 관객


슈만의 반려견들 중,

작은 체구의 장모종,

기록에 따르면 푸들 계열 혹은 코커스패니얼로 추정되는

슈테판이라는 이름의 반려견이 있었습니다.


슈만이 직접 이름을 지어주었고,

매일같이 그의 연습실에서 함께한 친구였지요.


슈만은 어느 날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고 전해집니다.


‘Heute saß er ruhig neben mir, und ich weinte leise.‘

‘오늘도 그는 조용히 내 곁에 앉아 있었고, 나는 조용히 울었다.‘


그 어떤 위로보다 조용하고 깊은,

가장 진실한 동행.


낮엔 슈만이 작곡에 집중을 하면서

슈테판을 돌보아 주고,

낮시간에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로서

무대와 공연으로 자리를 비우던 클라라는 밤에

슈테판을 돌보았다고 전해집니다.


클라라 비크(Clara Wieck, later Schumann)

당시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던 젊은 피아니스트이자,

언론과 평론가들에게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젊은 연주자 중 한 명”,

“최고의 여성 피아니스트”로 불렸습니다.


또한 그녀는

“피아노의 여왕(Queen of the Piano)”,

“Schumann’s brilliant bride(슈만의 찬란한 신부)”라 불리며, 쇼팽조차 감탄했던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음악과 사랑이 깃든 울림을

묵묵히 지켜낸, 가장 따뜻한 존재 슈테판.


슈테판은 그 이름처럼,

보호자의 음악을 가장 조용히

가장 영예롭게 들어주는 존재.

어쩌면 슈만에게는

위안과 승리의 작은 월계관이 되어주었는지도 모릅니다.




3. 슈테판이 전해주던 영감

- 말보다 마음, 음악보다 먼저 다가온 존재


슈만은 어느 날 이렇게 고백했어요.


‘Der Hund an meiner Seite weiß meist zuerst, wie es um mich steht.‘

‘내 곁에 있는 개가,

오늘의 내가 어떤 상태인지 가장 먼저 안다.‘


마치,

말보다 마음이 먼저 도착하는 것처럼.

조용히 옆에 앉아 있기만 해도,

그는 슈만의 가장 정직한 거울이 되어 주었죠.


음악이 흐르지 않을 때도,

멜로디가 망설이는 순간에도,

슈테판은 그 자리를 묵묵히 지켰습니다.


Kinderszenen, Op. 15 (1838) : Robert Schumann

왼) 《어린이 정경》 초판 표지,

오) 제1곡 〈이상한 나라와 사람들〉 악보 일부.



특히, 《Kinderszenen (어린이 정경) Op.15》의 마지막 곡

〈Der Dichter spricht – 시인이 말하다〉를 쓰던 날.

슈테판은 한마디 소리도 없이

그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고 해요.




‘음악을 듣고 있었다.‘

기록은 단 한 줄이었지만,

그 고요 속에는

말보다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을지도..


고개를 살짝 기울인 하나의 몸짓,

숨소리조차 흐르지 않는 정적 속

다정한 존재의 작은 기척 하나가

슈만의 마음에 조용히 내려앉았다고 해요.



그날의 멜로디는

더 다듬지도, 바꾸지도 않고

슈테판이 그 음악을 가만히 듣고 있었기에

슈만은 작곡한 선율을 그대로 두기로 마음먹었고

‘조용한 동의‘는 그렇게 곡을 피워냈다 합니다.


음악은 때로

그 무엇도 덧붙이지 않는,

순한 응시 하나에서 완성되기도 하니까요.


슈만은 말년에 깊은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신경 쇠약과 불면, 환청과 우울증…


이때,

실제로 주변의 기록에 따르면,

감정 기복이 심했던 날들 속에서도

슈테판이 곁에 있는 날이면

슈만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고,


무기력한 날에도 그를 바라보다

피아노 뚜껑을 조용히 여는 모습이 목격되었다고 해요.


한동안 멈췄던 악상이

다시 피어나기 시작한 시기에는

슈테판이 더 자주 곁을 지켜주었었다..라는

클라라의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병원에 입원해 가족의 면회조차 금지되던 시기,

상태가 점점 심각해지던 마지막 시간까지도

슈테판만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고 전해져요.

( 따뜻한 동행이 가능하도록 배려해 준 병원에, 조용한 감사를 보냅니다.)


그 시간이 얼마나 외롭고 두려웠을까요..

사랑을 간직한 한 생명이

끝까지 그의 곁에 있었다는 기록이..

우리를 오래도록 생각에 잠기게 합니다.


슈만의 ‘사랑의 기척’이라 할 수 있었던

슈테판.


말없이 건네는 위로이자,

슬픔을 자신의 온기로 감싸주는 존재.

또한,

음악을 끝까지 함께한

가장 조용하고 따뜻한 관객이었어요.


말 한마디 없었지만,

그 침묵은 어떤 위로보다 깊었고,

존재만으로 마음을 조용히 감싸주었지요.




슈테판이라는 이름의 반려견이

피아니시모로 들려준,

가장 따뜻한 큰 목소리..

반전의 진실이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Kinderszenen에 대하여



《어린이 정경(Kinderszenen, Op.15)》은

로베르트 슈만이 1838년 라이프치히에서 작곡하고,

이듬해 출판한 피아노 연작입니다.


그는 당시 약혼자였던 클라라 비크에게 이 곡을 헌정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두 사람은 이후 1840년 9월 12일, 사랑과 음악의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슈만은 약 30여 곡을 쓴 뒤 그중 13곡을 선별해 작품으로 묶었고, 마지막 곡 〈Der Dichter spricht - 시인이 말하다〉에는 “말이 아닌 음악으로 영혼이 속삭인다”는 그의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1840년은 특별한 해였습니다.

음악사에서는 이 시기를 흔히

‘노래의 해(Year of Song, Liederjahr)‘ 라 부릅니다.

결혼을 앞둔 그해, 슈만은 단 한 해 동안 130곡이 넘는 가곡을 남긴 것으로 전해집니다.


사랑과 예술의 하모니가

하나의 선율로 피어올랐던 아름다운 시기였습니다.




*이야기 속, 음악이 남긴 말 없는 단어들


~ Lieder / Lied

독일어로 Lied는 ‘노래’ 또는 ‘예술가곡’을 뜻하는 단어이며, Lieder는 그 복수형입니다. 주로 슈베르트나 슈만의 작품에서 ‘가곡’을 지칭할 때 쓰입니다.


~ Kinderszenen Op.15 / Der Dichter spricht

‘Kinderszenen(어린이 정경)’은 슈만이 작곡한 13곡의 피아노 소품 모음집이며, 그 마지막 곡 *〈Der Dichter spricht〉*는 ‘시인이 말하다’라는 뜻입니다. 말없는 고요함 속에 시적인 음악이 흐르는 작품입니다.


~ 피아니시모 (pp)

‘아주 여리게’라는 음악 용어로, 감정을 낮고 섬세하게 표현할 때 쓰이는 표현입니다. 여기서는 말없이 조용히 건네는 감정의 깊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