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있는 반전, 생각 없는 진실4) - 진동으로 이어진 이야기
진동을 느끼는 존재들 : 고양이와 작곡가 이야기
나는 오랫동안 궁금했어요.
우리 애기들(반려묘와 반려견)은 왜 늘
오른쪽 페달(댐퍼 페달)에 관심을 보일까?
그 다음엔
피아노 상판, 보면대,
그리고는 내가 앉은 의자…
이런 순서로 곁에 머무는 걸 좋아했거든요.
그저 우연일까, 아니면 무슨 이유가 있는 걸까?
Sergei Vasilyevich Rachmaninoff (1873 – 1943)
러시아 세묘노보 (Semyonovo, Russia)에서 태어나,
미국 베버리힐스 (Beverly Hills, U.S.)의 햇살 아래
음악처럼 잠들었다.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지휘자.
거대한 손과 섬세한 감성으로
인간의 슬픔과 구원을 동시에 연주한 마지막 낭만주의자.
그러던 어느 날,
라흐마니노프의 유쾌한 말 한마디를 듣고 팽팽했던
생각의 줄이 툭.. 하고 끊기는 기분이 들었죠.
“그게 소리 진동이 가장 좋은 자리니까. 작곡가랑 같지 뭐.”
그 말은 마치 저에게,
아무 말 없이 연꽃을 들어 보이신 어느 스승처럼 소리 없는 이해를 건네는 듯했어요.
괜히 웃음이 났고, (염화미소가 쓰윽…)
‘맞아…’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죠.
그건 바로,
울림이 가장 잘 스며드는 자리였던 거예요.
진동과 울림에 민감한 존재인 고양이와
음의 울림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작곡가… 딩동댕!!!
무시카, 그리고 한 장의 사진
그의 고양이 이름은 ‘무시카(Muschka)’ 였어요.
러시아어로는 ‘작은 파리’란 뜻이지만,
귀엽고 소중한 존재를 부를 때 쓰는 애칭이랍니다.
우리말로 치면… ‘냥이’쯤 될까요?
러시안 블루(Russian Blue)
혹은 샤트룩스(Chartreux) 계열로 추정되는 회색 고양이.
라흐마니노프의 반려묘 ‘무시카(Muschka)’는
아마 이런 조용하고 우아한 모습이었을지도요.
라흐마니노프는 그렇게 고양이를 부르며 다정히 쓰다듬곤 했대요.
그 모습을 담은 흑백 사진 한 장이 있어요.
짧은 털에 희미한 줄무늬가 흐르는 회색 고양이를 조심스럽게 안고 있는 그의 얼굴.
그 아이가 바로, 무시카였다고 전해져요.
( 제 커버 이미지 속 그림이요. )
품종은 Russian Blue일 수도,
회색 태비(Tabby)였을지도 모르겠어요.
그 고양이가 어떤 품종이든, 중요하지 않죠..
가장 눈에 들어온 건…
서로를 향한 다정한 신뢰와,
마치 음악처럼 번져오는 울림이었으니까요.
라흐마니노프의 가족.
위: 어린 딸 이리나와 함께한 라흐마니노프의 모습.
아래: 성장한 둘째 딸 타티아나의 초상
품 안에는 그들과 사랑했던 반려견이 있습니다.
음악과 생명이 언제나 함께했던 삶.
고양이와 함께한 선율들
1) 라흐마니노프의 대표곡 〈Vocalise〉.
가사는 없지만, 마음은 가득한 곡이죠.
이 말 없는 선율을 들을 때면,
사람들은 종종 그의 고양이 무시카와의 조용한 교감을
떠올리곤 해요.
물론, 이 곡은 무시카를 떠올리며 직접 쓴 작품은 아니에요.
하지만 말없이 곁을 지켜주는 존재가 주는 위로,
그 눈빛과 숨결을 닮은 이 곡은,
고양이와 나눈 교감을 연상케 하죠.
그리고, 이렇게 곁을 지키는 듯한 울림은
그의 다른 곡들 속에도 스며 있었어요.
고양이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피어난,
찬연한 교감을 기억하게 하는 선율들입니다.
< 악흥의 순간 Op.16 No.4 >
짧지만 응축된 감정의 폭발.
처음부터 끝까지 쉼 없이 달리는 왼손…
( 브런치 프로필 속 제 사진이 바로 이 곡을 연주하던
순간이에요. 제가 진심 애정하는 곡입니다. )
이 곡은 라흐마니노프가 긴 슬럼프를 딛고, 다시 창작의 불꽃을 되찾던 시기와 겹쳐요.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죠.
“고양이 옆에만 있으면, 다시 피아노 앞에 앉고 싶어진다.”
…
그랬기에,
〈악흥의 순간〉은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한 그의 마음 속
불꽃 같은 곡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Elegie in e flat minor, Op.3 No.1 >
깊은 고독과 사랑을 머금은 곡.
이 음악을 들으면… 정말 눈물이 뚝뚝 떨어져요.
어떤 이들은 말해요.
이 곡이, 무지개다리 너머로 먼저 떠난
고양이를 그리워하며 쓴 곡일지도 모른다고요.
사실 여부를 떠나,
그 감정이 고스란히 음악 속에 스며 있는 건 분명합니다.
< Prelude in D Major, Op.23 No.4 >
피아노 위에 우아한 고양이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듯한 선율.
장조이지만, 어딘가 마이너 같은 느낌의
세상 너무나 아름다운 전주곡이에요…
라흐마니노프의 가족들은 회상했죠.
“이 곡을 연주할 때면, 고양이가 유독 반응했어요.”
이러한 냥이의 반응도… 어쩌면 이 곡의 일부였을까요?
Sergei and Natalia Rachmaninoff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곁엔
늘 조용히 그의 음악을 듣던 고양이 무시카가 있었고,
그 존재는 음악을 듣는 이의 마음속에 그려진 모습으로..
또 때로는 실제 음악의 반응 안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말 없는 친구와 나눈 시간이
선율 속에 아름답게 살아 숨 쉬듯 피어나
오늘 우리에게도 말을 걸고 있는 듯 합니다.
부드럽지만 강하고 유연하게 마치, 고양이의 발걸음처럼요…
음악은 언제나, 말 없는 생명들 곁에서 피어났어요.
Sergei Rachmaninoff’s Villa Senar by Lake Lucerne
- a home filled with music, light, and quiet devotion.
고양이는 그 울림 속에서, 묵묵한 청중이자 따뜻한 응원자처럼 라흐마니노프의 곁을 지켜주었지요.
그리고, 때로는 작곡을 멈추게 할 만큼…
그 존재 하나로만으로 하루가 가득 채워질 만큼, 고양이와 함께 시간을 흘려보냈습니다.
1924년, 라흐마니노프는 딸 타티아나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어요.
“이 아이는 지금 내 다리 위에 누워서,
작곡은커녕 꼼짝도 못 하게 만들어.
오늘은 하루 종일 이 아이 쓰다듬기만 했단다.”
( This one lies on my legs now, making composing
impossible. I spend my day stroking him. )
지인들은 이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대요.
“그 고양이는 그의 영감을 방해한 존재가 아니라, 혼란을 정리해주는 조율자였지.”
“A silent muse by the piano.”
That’s right!!!
냥님은 작곡을 늦추는 존재가 아니라,
마음의 리듬을 다잡아 주는 존재였던 거죠.
58000%이해가 가는…
현명한 템포 메이커였던 거예요.
어느 날, 라흐마니노프는
스트라빈스키가 꿀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커다란 꿀단지를 들고 한밤중 그의 집을 찾아가기도 했대요^^
( 큰 키의 그가 꿀단지를 소중히 안고 친구집을 가는 모습이 전 왜 재밌을까요?ㅋㅋ)
“그의 음악보다 그 꿀이 더 달았어요.”
“Sweeter than music itself.” - Igor Stravinsky
(Left: Sergei Rachmaninoff, Right: Igor Stravinsky)
스트라빈스키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답니다.
두 사람은 음악적으로는 ‘동시대를 산 과거와 미래’처럼 보였지만, 인간적으로는 말없는 존중과 따뜻한 일화 하나를
같이 일궈낸 분들이죠.
또 하나,
그가 만든 출판사 이름은 TAIR.
큰딸 Tatiana(타티아나)와 둘째 Irina(이리나)의
이름을 따서 지었어요.
딸의 이름으로 음악을 남기고,
음악으로 그들을 품은 아버지였죠.
“Midnight muse in the hotel suite”
그리고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더.
콘서트 리허설이 있던 어느 날,
그는 호텔 방에 고양이를 몰래 데려갔고, 아마도
환경이 바뀐 고양이는 밤새 ‘뮤우뮤우’ 울었다 합니다.
스태프들은 새벽까지 그가 성악 연습을 하나.. 란
착각을 했다 하네요.. ㅎㅎ
우리는 그를 ‘장엄한 슬픔의 거장’으로 기억하지만,
그 슬픔의 울림 아래엔 조용히 무릎 위에 누운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던 거예요
에필로그처럼
더 자세히, 더 많은 설명을 덧붙이다 보니
말이 길어지고, 여운은 줄어든 것 같아요.
그래도 잠시 멈춰, 조용히 덜어내는 연습을 해봅니다.
짧고 맵시 있는 글로 전하고 싶었지만,
제가 그렇게 되길 바라며
오늘도 조심스레 써 내려갑니다.
(아마 다음엔, 더 조용히… 더 단정히…)
그래도 그와 무시카,
그리고 그 음악의 여운만큼은
잠시라도 함께 머물러 있었기를 바랍니다.
다음에 또 만나요. :)
커버 이미지에 대하여
이 글을 쓰며 자주 떠올랐던 장면이 하나 있었습니다.
고양이를 품에 안고, 말없이 음악을 듣던 어느 날의 라흐마니노프. 이 연필 드로잉은 그 장면을 조용히 감성적으로 담아낸 이미지입니다.
실제 사진을 바탕으로 재현된 이 그림은,
공식 아카이브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일부 팬 커뮤니티를 통해 전해지는 희귀 사진을
모티브로 삼아 그려졌습니다.
마치, 말보다 먼저 마음이 도착하는 순간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