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뷔시와 슈슈, 그리고 치지 않은 음표 }

(이유 있는 반전, 생각 없는 진실5) 말보다 깊은 음악

by 이정민 Ophelia


세상에는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감정이 있어요.

그건 어쩌면 아주 오래전, 우리 마음 한편에 조용히

스며든 기억일지도 몰라요.

아니면, 말없이 곁을 지켜주던 누군가가 남기고 간

속삭임 같은 선율이었는지도 모르죠.



음악가에게 ‘기억’은, 단지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손끝에 내려앉는 소리의 감촉이에요.

그 감촉 속에는, 눈빛으로 마음을 전하던 작은 친구들,

소리보다 더 깊게 마음을 나눴던 하루들이 담겨 있어요.


그 아이들은 말 대신 눈으로 대답을 전하고,

발랄함과 얌전함 속에서

음악은 숨결처럼 겹겹이 피어납니다.

드뷔시는 그런 존재들과 배려 깊은 공존을 나누던

사람이었어요.

오전엔 진한 커피, 오후엔 무화과잼과 마들렌을 곁들여

고요한 시간을 즐기던 사람.

그 풍경은, 마들렌 한 조각에서 유년의 기억을 꺼낸

그의 친구, 프루스트의 시간과도 닮아 있었죠.


“감각은 기억을 불러오고, 기억은 감각으로 되돌아온다.

음악이 빛이 되는 순간에.. “



• 고양이와의 시간, 그리고 딸에게 바친 전주곡


Claude Debussy (1862–1918).


드뷔시는 고양이를 사랑하는 작곡가였습니다.

회색 앙고라 고양이와 함께 지내며,

떠나보낸 뒤에도 새 고양이에게 같은 이름을 반복해

붙이곤 했어요.


‘토토르(Totor)‘, ‘린(Line)‘, 그리고 때때로

그의 외동딸, 클로드-엠마(Claude-Emma)의 애칭과도

같은 이름인,

‘슈슈(Chouchou)‘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는 딸 슈슈를 무척이나 아끼는 고슴도치 아빠였어요.

딸이 잠든 모습, 고양이와 노는 풍경,

그리고 어린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드뷔시에게 무지개같이 찬란한 음악이 되었겠지요.


1908년, 슈슈가 세 살이 되던 해,

드뷔시는 여섯 곡으로 이루어진 피아노 모음곡

《Children’s Corner》를 완성하며 이렇게 적었습니다:


드뷔시의 손편지 같은 음악, 사랑하는 슈슈에게 바친 헌정곡.


“To my dear little Chou-Chou,

with her father’s tender apologies for what follows.”


“사랑하는 내 작은 슈슈에게,

아빠가 쓴 음악을 미리 사과하며 바칩니다.”


이 다정한 ‘사과’는 실은 진심 어린 장난,

드뷔시 특유의 유머와 수줍음이 담긴 말이었어요.

어린이를 위한 곡이지만 음악은 꽤 정교하고,

리듬과 화성에는 장난기와 실험정신이 살아 있었으니까요.


아마 그는 속으로 이렇게 웃으며 말했을지도 몰라요.

“슈슈야, 네 인형들과 노는 걸 보며 곡을 썼는데…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어.

그래도 아빠의 마음은 진짜야.”


“이들의 시간을 닮은 음악.“



• 장난감 상자 속 풍경들


《Children’s Corner》의 여섯 곡은

딸의 놀이와 일상을 따라가듯,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표정으로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그중 한 곡인 < Serenade for the Doll > 은,

작고 사랑스러운 존재에게 건네는 음악적 선물처럼

들립니다.

드뷔시 특유의 섬세한 감성과 리듬이 살아 있는 이 곡은,

우리 어린 시절의 시간을 인형의 발걸음처럼 우아하게

되살려줍니다.


이 곡들의 제목이 모두 영어로 쓰였는데요.

딸의 영어 교육을 염두에 둔 드뷔시의 세심한 배려

때문이라고 전해집니다.


그는 《Children’s Corner》 외에도

딸과의 일상을 담으려는 시도를 음악 곳곳에 남기고자

했어요.


• 《La boîte à joujoux (The Toy‑Box)》, 1913년

장난감 상자 속 인형들의 이야기에서 출발한

이 어린이용 발레 작품은 딸의 상상력에서 영감을 받은

곡으로 여겨지지만, 아쉽게도 완성되지는 못했습니다.


그 외에도 공식적으로 ‘슈슈’와 연결된 작품은 많지 않지만,

드뷔시의 짧은 곡들, 혹은 미완성된 스케치 속 어딘가에는

그가 딸과 반려묘를 사랑으로 바라보던 그 시간들이

은은한 선율로 스며들어 있었을지도요.


드뷔시는 사랑을 말이 아닌 ‘작곡’이라는 방식으로

고백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언제나 함께했던 음악의 동반자, 드뷔시의 반려묘.”



• 치지 않은 음표, 말보다 깊은 음악 수업


드뷔시는 음악을 단순한 기술이나 연주가 아닌

‘말보다 더 정직한 대화’로 여겼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주 물었대요.

“그 음을 치기 전에,

그 소리가 정말 필요했는지 생각해 봤니?”


답보다 그의 침묵이,

소리보다 먼저 ‘느낌’을 피워 올렸고,

‘소리의 이유’를 스스로 찾아가게 했어요.


그의 작업실은 조용한 공존의 공간이었습니다.

연필 더미 사이, 건반 위, 악보 한가운데…

고양이들은 음악이 흐르든 멈추든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고,

드뷔시는 그들을 방해하지 않았어요.


가끔은 고양이가 피아노 위에서 조용히 잠든 모습을 보고, 실제로 리허설 시간을 미룬 적도 있었다고 해요.

잠든 존재의 평화를 음악보다 먼저 존중했던 사람.

그에게 ‘소리’는 함께 있음의 증명이었으니까요.



• 사슴과 어항, 조용한 문화가 남긴 기억


그런 그의 감각은, 제게도 추억처럼 남아 있습니다.


“런던 하이드파크의 사슴들. 그들은 도시의 중심에서도

‘쉬는 존재의 시간’ 으로서 공존했다.”



영국 유학 시절, 로열 컬리지 근처 하이드 파크엔

차가 지나다닐 수 있는 도로가 있었어요.

그 길 위로 사슴들이 무리 지어 누워 있었죠.

어느 차도 경적을 울리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아픈 사슴인가?” 싶어 관리인아저씨 또는

수의사선생님을 기대했던 저에게,

그 풍경은 ‘쉬는 존재의 시간’을 보여 주는 문화

그 자체였습니다.


WILD DEER ROAM FREELY IN THE PARK

(사슴은 자유롭게 공원을 거닙니다.)

접근하지 말라는 안내문조차, 공존의 예절을 가르쳐 준다.



그 평화로운 기다림을 마주한 이후..

제 연주의 어딘가에는

숨을 고르고, 여백을 채우고, 기다려주는 시간..

커다란 쉼표 하나가 생겼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함께 ‘음악’이라는 걸,

저는 그때, 마음으로 처음 느낄 수 있었어요.


또 다른 기억 하나는,

작은 생명을 들이기 전,

그 생명이 편안히 숨 쉴 수 있는 공간인가를

먼저 묻는 문화였어요.


반려어를 들이기 위해 들른 어느 매장에서

“이 어항에는 이 아이 한 마리가 적당합니다.”


어항의 크기와 환경에 따라

자연스럽게 마릿수를 제한하고,

조용히 지켜내던 배려의 규칙이 있었지요.


그때 받은 질문 하나가

제 마음속에 오래 남았습니다.


“이 생명들이 이 공간에서

자유롭게 숨 쉴 수 있을까요?”


드뷔시가 말보다 먼저 생각했던 것도,

아마 그런 것이었을 거예요.

소리보다 쉼, 연주보다 기다림.

그리고 음악보다, 함께 있는 존재의 ‘숨’을 들여다보는 일.



• 음악, 생각 끝에 손끝으로 내리는 한 줄의 시


‘사유’란, 단지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소리를 낼 때, 마음이 먼저 움직이고,

손은 그 마음을 따라가야 한다는 뜻이지요.


어떤 음은 상처보다 조심스럽고,

어떤 음은 오랜 기억같이 흐릿해야 합니다.


그래서 연주는,

생각보다 먼저 손이 가는 것이 아니라…

생각 끝에 손끝으로 내리는 한 줄의 시.


그런 기적이 조용히 우리 안에서 일어날 때,

비로소 음악이 시작된다고 믿었겠지요.


드뷔시는 제자들과의 수업에서도 ‘느낌’을 먼저 다뤘습니다.

어떤 음을 치면, 눈을 감고 있다가 조용히 말했어요.


“방금 너, 그 음이 왜 거기 있어야 하는지 알고 친 건가?”


고양이처럼 다가오는 질문,

소리 없는 리허설처럼…


어쩌면 그가 치지 않은 음표들이,

가장 깊은 음악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