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있는 반전, 생각 없는 진실11)굴라쉬, 랑고시, 카페의 음악
유럽 여행을 떠올리면
대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먼저 떠오릅니다.
하지만 유럽의 심장부에는,
조용히 그러나 품격 있게 빛나는 나라,
헝가리(Hungary)가 있습니다.
헝가리는 유럽의 한가운데서 독자적으로 빛나는 땅입니다. 음악과 예술, 그리고 일상 속 음식까지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빚어낸 특별한 곳이에요.
굴라쉬 한 그릇은 민중의 합창처럼 뜨겁고,
랑고시는 장터의 춤처럼 경쾌하며,
토카이 와인(Tokaji Wine)은 “왕의 와인, 와인의 왕”(Vinum Regum, Rex Vinorum)이라 불리며 오랜 역사의 노래를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다페스트(Budapest)의 카페의
커피 향 속에서 교향곡이 태어났습니다.
이번 글은 앞 글의 든든한 부록처럼,
그러나 협주곡의 카덴차(Cadenza)처럼
자유롭고 흥겹게 흘러가려 합니다.
헝가리의 향기로운 음식과 선율,
그리고 리스트 음악원(Liszt Ferenc Academy)이 간직한 예술의 숨결까지…
유럽의 작은 보석, 헝가리.
그 향기로운 선율과 예술혼의 심장 소리를,
우리 함께 들어볼까요?
굴라쉬 – 들판의 합창곡
헝가리의 햇살 아래 붉게 익은 파프리카
- 굴라쉬의 향기를 빚어내는 원천
굴라쉬(gulyás)라는 이름은,
원래 ‘구야시(gulyás, 소몰이꾼)’에서 왔습니다.
하루 종일 들판에서 소를 몰던 사람들이
해가 지면 모닥불을 피우고,
커다란 솥에 양파와 고기, 감자, 그리고 파프리카를
듬뿍 넣어 끓여낸 스튜였지요.
굴라쉬는 헝가리를 대표하는 요리이자, 온 국민이 사랑하는 음식입니다.
여기서의 파프리카는
우리가 흔히 아는 샐러드용 채소가 아니었습니다.
헝가리에서는 햇살에 말려 곱게 빻아낸 붉은 가루,
paprika powder로 더 많이 사용했습니다.
매운맛부터 달콤하고 고소한 맛까지..
등급이 다양해 굴라쉬뿐 아니라
거의 모든 요리에 들어가는 국민 조미료였지요.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고춧가루 같은 역할을 하며,
농부의 땀과 햇살이 고스란히 스며든
헝가리의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굴라쉬의 붉은빛은 헝가리 민중의 삶과 음악처럼
짙고 뜨겁게 타오르는 듯합니다.
김이 피어오르는 냄새는 서로의 땀을 위로하며
긴 하루를 마무리하는 민중의 합창곡이 되었지요.
그리고 바르톡이 농부의 흥얼거림에서 예술을 길어 올렸던 것처럼, 굴라쉬의 향기 속에는 헝가리의 노래와 삶의 색채가 은은히 배어 있는 듯합니다.
랑고시 – 장터의 춤곡
마늘 향 가득 갓 튀겨낸 도우 위에 치즈와 사워 크림이 흘러내리는, 헝가리의 길거리 소울푸드 랑고시(Lángos)
랑고시(Lángos)는 빵을 굽고 남은 반죽을
기름에 튀겨 만든 서민 간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에 마늘, 사워크림(Tejföl), 치즈가 얹히자
순식간에 장터의 별미가 되었지요.
아이들이 손에 들고 뛰어다니며 웃음을 터뜨리고,
어른들은 포도주 한 잔 곁들여 흥얼거리는 풍경.
랑고시는 길거리 음식이 아니라, 장터의 춤곡이었습니다.
마치 《루마니아 민속 무곡(Romanian Folk Dances)》의
흩날리는 리듬처럼요.
치즈 – 의외의 빈자리
농가의 정취와 함께 맛보는 담백한 헝가리 치즈
- 전통의 맛을 품은 한 조각
와인이 깊게 뿌리내린 나라라면 늘 치즈를 떠올리지만,
헝가리 치즈는 세계적으로 큰 명성을 얻지 못했습니다.
헝가리의 초원이 유럽 다른 나라처럼
소 사육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워크림(Tejföl)과 투로(Túró) 같은 치즈는
헝가리 가정 요리와 디저트에 빠지지 않는 재료였습니다.
부드럽고 고소한 투로(Túró) 치즈
- 헝가리 가정식과 디저트의 단골 손님
세계적으로는 덜 알려졌지만, 오히려 이것이
헝가리 음식의 개성과 반전이 되었습니다.
“와인은 왕의 품격을 지녔지만,
치즈는 소박한 식탁의 정을 지켰다.”
헝가리 음식 문화의 입체적인 풍경이죠.
토카이 아수(Tokaji Aszú) 와인 – 황금빛의 반전
굴라쉬가 들판의 합창곡이라면,
토카이 와인(Tokaji Aszú)은 황금빛 독창이었습니다.
“와인의 왕, 왕의 와인”이라 불리며
루이 14세와 하이든, 헨델까지 매혹시킨 술.
한때는 황제와 귀족의 전유물로,
불로장생주라 불릴 만큼 귀하게 여겨졌지요.
황금빛의 깊이, 병 속에 담긴 헝가리의 세월
- 토카이 와인의 황금빛 품격
지금은 왕의 식탁을 넘어,
헝가리 사람들의 저녁 식탁과 축제에도 함께 오릅니다.
그 강건한 와인 속에는
여전히 달콤함이 품격처럼 숨어 있고,
헝가리인들의 열정과 자존감은 이제 그 술잔 속에서,
헝가리 전체를 아우르는 맛으로 천천히 녹아들었는지도 모릅니다.
~ 붉음과 황금빛의 변주
굴라쉬의 붉음은 들판의 뜨거운 심장이었고,
아수(Aszú) 와인의 amber-golden glow는 세월이 숙성시킨 품격이었습니다.
수많은 순간을 기억한 코르크와 한 병의 토카이
~ contrary scale의 조화
amber-golden glow의 황금빛과, 굴라쉬의 붉은색은
마치 반행하는 음계(Contrary Scale)처럼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달라도 닮았고, 어긋나도 결국 다시 만나
하나의 헝가리 화음을 이루는 듯하지요.
부다페스트의 카페와 리스트 음악원
작가와 음악가들이 머물던 부다페스트 카페,
대화와 선율이 넘쳐흘렀던 시간의 흔적
19세기 부다페스트는 카페의 도시였어요.
좁은 탁자 위에서 커피 향이 피어오르면,
작가와 시인, 음악가들이 모여 밤을 새웠지요.
작은 잔에 담긴 검은 물결은 영감의 바다가 되었고,
그 바다에서 태어난 음표들은 도심을 넘어 유럽으로 퍼져나갔어요.
그 중심에는 한 사람의 이름이 빛나고 있었어요.
리스트.
그가 직접 세운 리스트 페렌츠 음악원(Liszt Ferenc Academy)은 1875년부터 지금까지, 헝가리 예술혼이 맥박 치는 심장이 되었지요.
음악의 정의를 품은 현관 - 리스트 음악원의 장엄한 얼굴
정문 상단에는 정의의 여신(Justitia)이 서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는 저울이 아닌 리라(lyre, 수금)가
들려 있어요.
법의 정의 대신 음악의 정의,
예술의 균형을 지키겠다는 상징이지요.
거대한 바로크풍 현관에 들어서면,
그 여신의 시선 아래로 발걸음이 이어집니다.
대리석은 숨을 쉬듯 웅장하게 빛나고,
홀 천장에는 수많은 세대의 음악이
겹겹이 쌓여 메아리칩니다.
바르톡(Bartók)은 이곳에서 민속 선율을 채집해 세계의 언어로 풀어냈고, 코다이(Kodály)는 합창으로 사람들의 목소리를 하나의 심포니로 엮어냈지요.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서 젊은 연주자들이 모여,
리스트의 피아노가 남긴 불꽃을 다시 이어받고 있어요.
피아노 건반에 내려앉은 햇살이,
어쩌면 그 시절 카페의 작은 촛불과 이어져 있는지도요.
에스테르하지 가문
- 궁정의 화려함과 답답함의 역설, 달콤한 반전
교향곡과 현악사중주의 황금기를 하이든과 함께 빚어낸, 음악을 사랑한 에스테르하지 가문.
헝가리 귀족 가운데 가장 유명한 에스테르하지 가문은
음악사에 거대한 흔적을 남겼습니다.
하이든은 무려 30년 넘게 이들의 궁정악단에서 일하며,
교향곡과 현악사중주라는 장르를 꽃피웠지요.
하지만 그 화려한 궁정 속에서 하이든은 종종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는 편지를 썼습니다.
궁정의 답답한 울타리 속에서, 오히려 자유를 그리워하며
수많은 걸작들이 탄생했던 역설.
바로 이 반전이 헝가리 귀족문화의 빛과 그림자였습니다.
에스테르하지의 달콤한 역설
헝가리 귀족 에스테르하지 가문은 하이든을 후원하며
18세기 유럽 음악사의 한 장을 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름이 더 널리 알려진 것은
화려한 레이어 속에 호두와 크림을 층층이 쌓아 올린 디저트
‘에스테르하지 토르타(Esterházy Torte)’였지요.
음악을 사랑한 귀족 가문의 이름을 딴 달콤한 케이크,
에스테르하지 토르타
궁정의 엄숙한 후원과,
카페에서 웃음과 함께 나누던 달콤한 케이크.
이 극적인 대비야말로 헝가리 문화가 지닌
반전의 매력입니다.
그의 마음이 늘 고향을 향해 있어서일까?
교향곡의 아버지, Joseph Haydn.
Well, here I sit in my wilderness.. forsaken.. like a poor waif.. almost without any human society.. melancholy.. full of the memories of past glorious days..”
— Joseph Haydn, Letter to Marianne von Genzinger, February 9, 1790
“지금 나는 나의 황무지에 앉아 있어요..
버려진 고아처럼.. 거의 인간 교제도 없이..
지난 찬란했던 날들을 떠올리며..”
- 하이든, 1790년 2월 9일, 겐칭어 부인에게 보낸 편지
작은 카덴차, 큰 울림
굴라쉬의 합창, 랑고시의 춤, 치즈의 소박한 자리,
토카이의 황금빛 반전, 카페와 음악원의 심장,
그리고 에스테르하지의 달콤한 반전까지…
헝가리의 풍경은 언제나 이유 있는 반전 속에서 빛났습니다.
작은 카덴차처럼 시작된 이야기이지만,
그 여운은 헝가리라는 교향곡만큼 깊고도 길게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