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 맥주, 신화 그리고 오래된 계약》
이번 달 이야기는 맥주와 신화, 그리고 9,000년 묵은 ㅇㅇ 이야기입니다.
ㅇㅇ… 무엇일까요?
혹시 구미호가 떠오르셨나요? ^^
전설이 아닌 현실 속,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오래된 약속,
‘계약’ 이야기입니다.
1) 신들의 술잔
10월은 수확의 달, 건배의 달.
북쪽 들판에는 황금빛 보리가 파도치고, 그 사이에 서 있는 이는 프레이르(Freyr), 풍요와 농경, 평화의 신이에요.
그의 선물은 다름 아닌 맥주.
따뜻한 공동체와 흙냄새가 함께 담긴 잔이죠.
왼 : 프레이르의 손엔 맥주가,
오 : 디오니소스의 손엔 보이지 않는 와인이.
지중해의 햇볕 아래에서는 보랏빛 포도가 영글어가요.
그 열매에 황홀한 혼을 불어넣은 이는 디오니소스(Dionysus, 로마에서는 바쿠스 Bacchus), 와인의 신이었답니다.
그의 선물은 인간을 해방시키는 도취와 예술이었지요.
맥주는 땅과 곡식이 나누는 건배,
와인은 예술과 해방의 열쇠.
술잔은 달라도,
두 신 모두 인간에게 환희를 허락해 준 존재였어요.
2) 10월의 꽃, 신들의 언어
코스모스(Cosmos)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 질서와 조화로 피어나는 가을의 노래
이름의 뿌리는 그리스어로는 kosmos, 혼돈(카오스 chaos)에서 태어난 질서와 조화를 뜻한답니다. 우주의 탄생 신화처럼, 코스모스는 소란스러운 삶 속에서 고요히 피어나는 균형을 상징하죠. 그래서 프레이르(Freyr)의 풍요와 평화와 닮았다고 할 수 있어요. 들판에 흩날리는 코스모스는 마치 혼돈을 잠재우는 작은 수호자처럼, 꽃잎 위에 조용히 질서를 얹어 놓는 것 같아요.
메리골드(Marigold)
삶과 죽음, 환희와 재생을 동시에 품은 메리골드의 색의 향연
이름의 기원은 Mary’s Gold,
태양의 빛을 머금은 꽃이에요.
그런데 이 빛은 단순히 환희만 품은 게 아니라,
죽음과 부활을 함께 안고 있답니다.
멕시코의 망자의 날(Día de los Muertos)에는
영혼이 이 꽃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온다고 믿었고,
인도의 제단에서는 부활과 재생의 상징으로 바쳐졌어요.
또 금잔화(Calendula)는 예로부터 약용으로 쓰여
상처를 치유하고 몸을 지켜주는 꽃이기도 했죠.
메리골드는 디오니소스(Dionysus)의 술잔 같기도 해요.
디오니소스의 술잔은 단순한 즐거움의 잔이 아니었어요.
환희와 광기, 생명과 죽음을 함께 담아 인간을 다른 세계와 이어주는 신비한 잔이었대요. 메리골드는 그런 술잔처럼 환희와 고통을 동시에 머금은 꽃, 삶과 죽음을 이어주는 황금빛 다리가 되어주었습니다.
코스모스가 조화와 평화를 들려준다면, 메리골드는 죽음을 넘어서는 환희와 재생을 속삭여 줍니다.
두 꽃은 다르지만, 10월의 햇살 속에서 함께 말해요.
“삶은 혼돈 속에서도 꽃처럼 피어나고, 사라짐 속에서도 다시 환하게 이어진다.”
3. 기네스, 9,000년짜리 농담 같은 계약
아서 기네스와 9,000년 계약의 서명
1759년 더블린(Dublin). 아서 기네스(Arthur Guinness)는 세인트 제임스 게이트(St. James’s Gate) 양조장에 서명합니다.
기네스를 상징하는 하프(Clàirseach)
- 아일랜드의 전통을 품은 로고와 흑맥주의 잔
조건은 단 하나.
• 임대료: 연 45파운드(£45)
• 기간: 무려 9,000년
만료일은 서기 10,759년.
현재가 2025년이니까, 계산해 보면:
10,759 - 2025 = 8,734년 뒤예요.
다시 말해, 지금으로부터 약 8천7백 년 뒤에야 계약이 끝납니다.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시간이라, ‘9,000년짜리 농담 같은 계약’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지요
흑맥주 잔 속 거품처럼 농담 같지만, 실제 역사로 남은 이야기입니다.
• 왼쪽 (Lovely day for a Guinness)
농담 같은 9,000년 계약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훗날 세계인의 일상 속 따뜻한 광고 문구로 이어졌다.
• 오른쪽 (The Goodness of Guinness)
아서 기네스의 정신은 맥주잔을 넘어 지역사회와 사람들을 위한 선행으로 이어졌다. 더블린에는 ‘The Goodness of Guinness’라는 말처럼 선행의 역사가 남아 있다.
계약 당시 45파운드는 장인 한 해 품삯에 버금가는 거액이었습니다.
1759년의 £1 는 지금의 30만 원 이상에 해당한다고 해요.
그 시절엔 일반 노동자의 연봉이 £20~30 정도.
그러니까 £45는 ‘보통 사람의 1~2년치 연봉‘ 수준의 큰돈이었지요.
그러나 2025년 오늘날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9만 원 남짓, 그 당시에 비하면 푼돈에 불과해졌어요.
옛날에는 대담한 모험의 대가였던 금액이, 지금은 농담처럼 작은 돈이 되어 버린 반전이에요.
훗날 아서 기네스는 땅 일부를 매입해 사실상 영구 소유권을 가지게 되었지만, 전설처럼 전해지는 ‘9,000년 계약’ 은 지금도 브랜드의 상징으로 살아 있습니다.
• 왼쪽 (바 내부, 기네스 생맥주 디스펜서)
- 세인트 제임스 게이트에서 시작된 기네스의 맥주 문화, 오늘도 전 세계의 펍에서 이어진다.
• 오른쪽 (창가에 비친 기네스 로고)
- 아서 기네스의 서명이 담긴 불빛.
4) 현재의 한 모금
Guinness with Barack Obama, Ireland 2011
2011년, 오바마 대통령(Barack Obama)이 아일랜드 머니걸의 전통 펍에서 기네스를 직접 따르고, 거품이 가라앉기를 기다린 뒤 첫 모금을 마셨습니다.
그 장면은 아일랜드와 미국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고, 지금도 아일랜드인들의 자부심으로 회자됩니다.
잔을 다 비웠느냐는 질문에 오바마는 웃으며 이렇게 답했지요.
“Yes, I finished it. The Guinness in Ireland tastes so much better than in the States.”
(“네, 전부 다 마셨습니다. 아일랜드에서 마시는 기네스는 미국에서 마시는 것보다 훨씬 맛있어요.”)
그 한 마디는 그대로 전설처럼 퍼져 나가, 아일랜드에서는 ‘오바마도 다 비운 기네스’라는 별명과 기념품까지 생겨났습니다.
2011년, 머니걸을 찾은 Barack Obama 대통령.
그날의 환호는 전시관 속 기억으로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2025년 오늘날, 기네스는 여전히 정치와 문화를 잇는 살아 있는 상징으로 건배의 순간마다 빛나고 있습니다.
5) 기네스, 아일랜드의 또 다른 국기
Emerald Isle, 아일랜드의 끝없는 초록빛 풍경.
숲과 초원이 부르는 생명의 노래.
기네스 한 잔은 단순한 술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일랜드의 또 다른 국기입니다.
검은 맥즙은 이 섬의 땅,
비와 바람,
오래된 고난을 품고,
그 위에 얹힌 크리미 한 거품은
평화와 화합의 염원을 조용히 띄웁니다.
잔을 들어 올리는 순간,
배경에 스며드는 초록빛 풍경은
에메랄드 아일이라 불리는 숲과 초원의
끝없는 생명력을 닮았습니다.
한 잔 속에서 역사와 희망이 부딪치고,
고난과 환희가 어깨를 맞댑니다.
사라지는 거품은 순간을 노래하고,
남겨진 검은빛은 시간을 기억합니다.
그러므로 건배는,
아일랜드의 또 하나의 노래.
땅과 사람과 하늘이 함께 들이켜는
묵직한 기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