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riation 1. 베토벤 , “나는 바쿠스다”

《이유 있는 반전, 생각 없는 진실》 별책부록

by 이정민 Ophelia


10월, 바쿠스와 디오니소스를 떠올리다 보니

술잔을 가까이하며 음악을 나누던 예술가들의 일화들이 하나둘 떠올랐습니다.

이 글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마치 작은 별책부록처럼,

그 술잔에 비친 다섯 개의 변주(Variation)를 따라가 보고자 합니다.


궁정의 계약서에도 와인과 맥주 할당이 적히던 시대가 있었지요.

오늘날의 복지 쿠폰처럼 예술가의 삶을 지탱해 주던 항목이 바로 술이었습니다.

그 술잔은 어떤 이에게는 자유의 약속이었고,

또 다른 이에게는 농부의 흙과 계절이었으며,

혹은 망명자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돌아보면

《이유 있는 반전, 생각 없는 진실》의 흐름으로 자연스레 이어집니다.

술잔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예술가의 삶을 뒤집고 반전시킨 무대였으니까요.


오늘, 첫 번째 변주의 문을 엽니다.



Variation 1. 베토벤 - 조건부 자유, “나는 바쿠스다”


1809년, 프랑스군이 점령한 직후의 비엔나.

베토벤은 카셀 궁정으로부터 초청을 받았지만,

정든 도시를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때 제자 루돌프 대공(Rudolf Archduke)과 두 귀족, 로브코비츠 공작(Prince Lobkowitz), 킨스키 공작(Prince Kinsky)이 나서서 특별한 제안을 하지요.


조건은 단 하나, 비엔나에 남을 것.

대신 그들은 매년 일정액의 평생 연금을 보장했습니다.


1809년, 루돌프 대공과 귀족들이 서명한 베토벤 후원 계약서 원본. 이 계약은 그에게 ‘조건부 자유’를 보장했어요.



이 계약의 특별함은

베토벤의 창작을 얽매지 않았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그는 궁정악장처럼 행사에 끌려 다닐 필요가 없었고,

여전히 자유로운 예술가로서 작곡과 출판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떠나지 않는다는 단 하나의 조건으로 얻은

조건부 자유였습니다.


이 무렵 전해지는 일화가 있습니다.

한 후원자가 현금 대신 맥주통을 보내려 하자,

베토벤은 단호히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나는 작곡가지, 술꾼이 아니다!”


이 말은 편지나 일기에 남은 원문은 아니지만,

후대 전기에서 전해 내려오는 일화입니다.

그의 성격과 자존심을 떠올리면,

충분히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19세기 빈에서 사랑받던 라거 맥주 광고 포스터.

당시 시민들의 일상과 문화 속에서 맥주는

가장 대중적인 음료였어요.



당시 빈에서는 점차 밝은 색 맥주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훗날 ‘비너 라거(Vienna Lager)’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 맥주는 이후 라거 맥주의 전신으로 자리 잡으며

시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갔지요.

‘맥주통 보상‘ 이야기가 후대에 더욱 그럴듯하게 들려온 것도 이런 풍경과 겹쳐 전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베토벤은 직접 이렇게 쓴 적이 있습니다.


독일 화가(1781–1858), Joseph Karl Stieler가

1820년에 그린 베토벤 초상.

그는 바이에른 왕실의 궁정 화가로 활동하며

베토벤의 대표적 이미지 형성에 크게 기여했어요.



“Ich bin Bacchus, der den Menschen diesen köstlichen Nektar bereitet, der sie geistig berauscht.”

(“나는 바쿠스다.

인간에게 향기로운 넥타르를 내어,

그들의 영혼을 취하게 한다.”)


여기서 넥타르는 술잔의 와인이 아니라,

그의 음악이었습니다.

그에게 음악은 영혼을 취하게 하는

숭고한 와인이었던 것이지요.


저에게는 구전의 ‘술꾼이 아니다’ 라는 말보다,

‘나는 바쿠스다’ 라는 선언이

더 깊고 아름답게 다가옵니다.




반전의 잔을 들며


그의 술잔은 조건부 자유였고, 또 하나의 진실이었습니다.


19세기 빈 시내 풍경화.

카페와 맥주홀, 음악이 공존하던 일상 속에서

베토벤이 살던 도시의 활기를 느낄 수 있어요.



그리고 마침내,

예술가의 삶을 반전으로 빛내 준 넥타르가 되었습니다.


술잔이 계약서 위를 흔들던 시대에도,

베토벤만은 악보 속에서 자유를 지켰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술꾼이 아닌 바쿠스, 작곡가 베토벤’ 을 만납니다.




• 덧붙이는 글


베토벤을 그린 화가, 요제프 카를 스틸러


Joseph Karl Stieler, Self-portrait (1806)

바이에른 왕국의 궁정 초상화가이자,

젊은 시절부터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을 지녔던 스틸러.

훗날 그는 한 명의 음악가를 통해 ‘예술의 정신’을 그리게 된다.



1820년, 50세의 베토벤과 39세의 요제프 카를 스틸러(Joseph Karl Stieler)가 만났습니다.

그 무렵 베토벤은 이미 청력을 잃어

세상과의 대화가 노트를 통해서만 가능했지만,

젊은 화가 스틸러는 그 침묵 속에서

음악가의 고독과 인간의 품위를 붓으로 옮겼습니다.


독일 화가 요제프 카를 스틸러(1781–1858)는

바이에른 왕국의 궁정 초상화가로,

왕실 인물들을 그리며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1820년, 그는 어떤 의뢰도 받지 않은 채

스스로 붓을 들어 베토벤의 초상을 그렸습니다.


이미 세상과 단절된 그 앞에서,

스틸러는 고독 속에 깃든 예술의 존엄을 그리고자 했습니다.

그에게 베토벤은 ‘위대한 작곡가’이자,

시대의 정신을 품은 인간이었습니다.


Joseph Karl Stieler,

Beethoven with the Manuscript of the Missa Solemnis (1820), Oil on canvas. Beethoven-Haus, Bonn.


스틸러가 의뢰 없이 스스로 그린 베토벤 초상.

악보 속에는 〈Missa Solemnis〉의 한 페이지가 놓여 있다.

화가는 고독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그의 의지를 그리고자 했다.



스틸러가 그린 베토벤의 손에는

그가 1819년부터 1823년까지 4년에 걸쳐 작곡한

〈Missa Solemnis in D major, Op.123〉의 악보가

들려 있습니다.


베토벤은 이 작품을,

“내가 쓴 모든 음악 중 가장 마음을 쏟은 작품”이라

말했습니다.

그에게 이 미사곡은, 인간의 내면적 신앙과 영혼의 투쟁을 음악으로 형상화한 기도였지요.


초반 Kyrie는 무릎 꿇은 기도처럼 시작하고,

Gloria에서는 천상의 빛이 쏟아지며,

마지막 Agnus Dei에서는

인류의 평화를 향한 절박한 외침이 들려오는 듯 합니다.


〈Missa Solemnis〉는 베토벤이 세상에 남긴

‘기도이자 음악적 신앙고백서‘ 라 불립니다.

그리고 스틸러는,

그 기도의 순간을 붓으로 기록한 단 한 명의 목격자였습니다.


그 초상은

예술가가 다른 예술가에게 바친 경의의 기록,

다시 말해 ‘음악을 그린 화가” 의 고백이었습니다.


후대의 전기 작가들은 이 초상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얼굴은 단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음악의 얼굴이다.”


스틸러의 그림 앞에 서면…

그 문장의 의미가 조용히 들려 오는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