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기억으로부터
2003년, 아빠를 따라 온 가족이 중국 항저우에 정착했다. 지금까지도 중국 유치원 첫 등원날, 그 기억 조각들이 가물가물 떠오르곤 한다. 선생님도, 친구들도 분명 말을 하고 있는데 음소거를 한 듯 무엇도 해석되지 않았다. 얼굴에 피로가 가득해 보이는 선생님, 외계인 같은 더벅머리 아이들, 그들의 뻐끔거리는 입모양, 베일 것만 같은 스뎅 그릇, 쿰쿰한 향이 나는 하얀 쌀밥, 그 위에 까만 닭다리 하나, 숟가락 하나.
점심 급식을 모두가 맛있게 먹었지만 나는 차가운 스뎅 그릇을 앞에 둔 채 멀뚱멀뚱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스뎅그릇은 더러워 보였고 바짝 마른 갈색 닭다리 조림은 낯선 향이 났다. 수저가 달랑 숟가락 하나뿐인 것도 당황스러웠다. 숟가락으로 닭다리를 어떻게 먹어야 하나.. 다들 잘 먹는 게 이상했다. 선생님께서 숟가락을 쥐고 뭐라 뭐라 말하셨다. 말 뜻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무언가를 떠먹는 시늉을 하시는 것으로 보아 점심이니 먹으면 된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상냥하신 선생님께서 먹기 좋게 살코기를 발라주셨지만 나는 한 숟갈도 뜨지 못했다.
다른 행성에 온 것 같았다. 내 인생에서 맞닥뜨린 최초의 낯선 행성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상황이 싫거나 괴롭진 않았다. 오히려 생기가 돌았다. 호기심과 경계심이 아슬아슬 섞인 시선으로 공간과 사람들을 탐색하며 내 자리를 찾는 일은 짜릿한 긴장감을 줬다.
중국어를 모국어처럼 하게 되기까지의 중간 기억은 없다. 아무리 떠올려 보아도 첫날 이후 두 번째 기억은 유창한 중국어 실력으로 친구들과 어울리며 사랑받고 사랑했던 순간들이다.
2009년, 내 삶의 물줄기를 완전히 틀어버린 이동이 시작됐다. 갑작스레 한국행 비행기를 타게 된 건 아빠의 사업이 기울던 차에 엎친데 덮쳐버린 엄마의 유방암 발병 때문이었다. 옷가지만 겨우 챙긴 단출한 캐리어 1개와 함께 한국에 돌아온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나와 동생은 울산 고모댁에, 엄마는 항암치료를 위해 서울 이모댁에, 아빠는 중국에 남아 사업을 일으키려 애썼다.
아.. 정말이지 고작 아홉 살이 감당하기엔 너무 가혹했던 한 해였다. 큰 폭풍이 덮쳤고, 나는 뿌리 뽑힌 채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3번의 전학을 했다.
중국 사립 초등학교에서 고모댁 근처의 초등학교로, 다시 시골 할머니댁 근처 읍내의 초등학교로, 마침내 가족이 다 함께 모여 살게 된 수도권의 한 학교로.
고모댁에서 지냈던 6개월 남짓 동안은 내가 남동생의 엄마였다. 2살 터울 남동생은 예민하고 여렸다. 등하굣길 어린이집 버스로 마중 나가는 것부터 씻기고 재우기까지, 동생을 돌봤다. 엄마가 없을 땐 내가 엄마다, 내가 이 애를 꼭 지켜줘야지,라는 책임감만이 아홉 살의 나를 꿋꿋이 살게 만들었다. 항암치료로 만날 수 없었던 엄마와 매일 통화하고 문자를 주고받았던 070 전화기가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움으로 가슴이 뻐근해진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삶에선 서러움을 삼켜야 하는 상황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배웠다.
가족 4명이 뿔뿔이 흩어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한 집에 모여 사는 가족의 모습은 당연한 게 아냐. 이 평화는 노력해서 지켜내야만 해. 구성원이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지 못했을 때 공동체는 유지될 수 없어.
2009년, 지금 떠올려도 여전히 쓰린 기억이 많이 있다.
꿈만 같던 항주 생활이 끝난 뒤 3번의 초등학교 전학, 1번의 고등학교 전학을 거쳐 지금 여기, 홍익대학교에 도착했다. 불시착이라고 생각해 괴로워했던 날들이 있었으나 이제는 그 불시착마저도 내 삶의 일부임을 가슴깊이 받아들였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랬나. 15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어렴풋이 2009년의 의미를 가늠해 볼 수 있게 됐다. 12년 학창 시절 동안, 입학과 졸업이 같은 곳은 오직 중학교뿐이다. 내 삶은 안정, 정착과는 거리가 멀었다. 언제나 이동하고, 변화했으며, 새로운 환경에 던져서 적응하려 아등바등 버텼다. 태어난 지역에서 초, 중, 고등학교의 학창 시절을 보내고 사는 동네에 깊은 애정을 가진 친구들을 만날 때면 나는 가져보지 못한 안정감에 대한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크게 휘청이지 않았다. ‘전학생’ 이미지와 역할이 익숙해지면서, 낯선 환경에서 버텨내어 내 자리를 만드는 법을 터득했다. 수차례의 이동 속 어느 곳에서도 곧잘 적응해 냈고, 결국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어떤 새로운 곳에 떨어지든 나라면 기어코 적응해 낼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파란만장했던 어린 시절 덕분에 나만의 독특한 정서와 이야기를 얻을 수 있었다.
2024년, 나는 어디쯤 왔고 어디로 가고 있을까?
당장은 알 수 없을 거란 걸 알기에 조바심이 나지 않는다.
억지로 고민하고 괴로워하지 않으려 한다.
먼 훗날의 박채현에게, 24살 내가 그리고 있는 궤적의 의미 부여를 맡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