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삶과 죽음

죽으려는 사람을 말릴 수 있는가

by 무로

죽지 않을 논리적 근거가 없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면, 죽으려는 사람을 말린다는 행위는 논리적 설득이라기보다 감정적 호소에 가까워진다. 삶에 객관적인 이유가 없다면 “살아야 한다”는 말은 당위가 아니라 요청이 된다. 논리로 설득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말의 타당성은 더 이상 결정적인 의미를 갖지 못한다.


논리도 감정도 쉽게 닿지 않는 상태는 분명 존재한다. 삶과 죽음을 동등한 선택지로 놓고 저울질하는 상태, 혹은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 약해진 상태다. 이 지점에서는 어떤 말도 제대로 닿지 않는다. 인간의 기본적인 설계가 흔들린 상태에서, 그 사람을 말리는 일에 과연 의미가 남아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붙잡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말을 건네는 선택은 여전히 의미를 가진다. 삶과 죽음을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으로 인정하는 순간, 삶은 전제가 아니라 하나의 선택 사항이 된다. 삶이 필수가 아니게 되면, 죽음 역시 삶과 나란히 놓인 선택지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말을 건네지 않는다는 선택은, 삶과 죽음이 동등하다는 사고가 굳어지도록 내버려두는 쪽에 가깝다. 그래서 이때의 시도는 단순히 한 사람만을 위한 행동이라기보다, 삶이라는 선택 자체를 보존하려는 움직임에 가깝다.


말이 건네지는 이유는 상대를 바꾸기 위해서라기보다, 고립된 상태를 그대로 두지 않겠다는 신호에 가깝다. “살아라”라는 명령이 아니라 “여기에 누군가 있다”는 표시다. 어쩌면 삶에 대한 본능이 다시 작동할 시간을 벌어보려는 시도일 수도 있다. 논리가 아니라, 곁에 있음과 기다림, 혹은 침묵을 함께 견디는 선택일 수도 있다.


이 질문에는 명확한 결론이 없다. 우리는 항상 누군가를 말릴 수 있는 존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도 아니다. 남는 것은 각자가 어떤 태도를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다. 이 글은 결국, 죽으려는 사람을 말리겠다는 선택에 이르게 되는 하나의 사유 과정이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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