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하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사람들이 말하는 살아야 하는 이유들은 대체로 비슷하다. 가족 때문에, 책임이 있어서,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서,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기 때문에, 혹은 삶은 원래 소중하기 때문이라는 말들이다. 이 이유들은 대부분 선의에서 나온 말이고 실제로 많은 사람을 붙잡아온 이유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이유들이 정말로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지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소중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살아야 한다는 이유는 분명히 강력하다. 누군가를 잃게 될 슬픔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삶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소중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살아갈 이유가 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동시에 이 이유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는 없다. 소중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사람, 관계 자체가 고통이었던 사람에게 이 말은 오히려 잔인하게 들릴 수 있다.
책임과 역할 때문에 살아야 한다는 이유에 대해서는 나는 거의 공감하지 못한다. 책임은 삶의 이유라기보다 삶의 방향을 정하는 장치에 가깝다. 이미 살아가고 있을 때는 의미가 있지만 살 이유가 없는 사람에게 책임만 남겨두는 것은 인간을 설득하는 방식이 아니라 기능을 강요하는 방식에 가깝다. 살아야 할 이유 없이 책임만 주어진 삶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가 된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서 살아야 한다는 이유는 논리적으로는 꽤 그럴듯하다. 미래에는 지금과 다른 가능성이 있고 아직 닿지 않은 순간들이 남아 있다는 말은 틀리지 않다. 하지만 당장이 너무 불행한 사람에게 미래의 가능성은 쉽게 닿지 않는다. 이성적으로는 맞지만 감정적으로는 설득력이 약한 이유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말과 삶은 원래 소중하다는 말도 비슷하다. 실제로 고통은 옅어질 수 있고, 삶이 소중하다는 믿음은 사회적으로 강력하다. 하지만 “괜찮아질 수 있다”는 말과 “지금 견딜 수 있다”는 말은 다르며 삶이 소중하다는 선언은 질문을 설명하기보다는 덮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 모든 이유를 통과하고도 남는 질문이 있다. 죽으면 어차피 끝이라면 안타까움도 아쉬움도 고통도 느끼지 못할 텐데 불확실한 행복과 확실한 고통을 굳이 저울질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살아야 하는 이유들은 틀리지 않다. 하지만 그 이유들로는 충분히 설득되지 않았다.
이 지점에서 다음 질문이 시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아직 살아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