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인생의 유일하게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자살이다.”
이 문장은 처음 읽으면 당혹스럽다. 삶의 의미를 말해야 할 철학이, 왜 죽음부터 꺼내 드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시지프 신화에서 카뮈가 던진 이 문장은, 오히려 삶을 가장 진지하게 다루기 위한 출발점이다.
카뮈가 말한 자살은 충동이나 비극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에게 자살은 하나의 기준점이다. 세계에 본래 의미가 없다면, 그리고 그 사실을 인간이 분명히 인식한다면, 그다음 질문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삶은 과연 살 가치가 있는가. 이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는 철학은, 삶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그는 본다.
카뮈가 말한 세계는 합리적인 설명을 주지 않는다. 노력한다고 해서 항상 보상이 주어지지 않고, 성실하다고 해서 반드시 의미가 생기지도 않는다. 인간은 의미를 원하지만, 세계는 침묵한다. 이 간극에서 발생하는 것이 카뮈가 말한 부조리다. 삶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삶이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은 죽음을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자살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논리의 문제로 등장한다. 만약 삶이 아무 의미도 없다면, 살아 있어야 할 이유 역시 사라진다. 이 질문을 외면한 채 “그래도 살아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질문을 덮는 일에 가깝다. 카뮈는 그런 태도를 철학적 회피라고 본다. 삶을 말하려면, 먼저 죽음의 가능성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카뮈의 결론이 자살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는 자살을 부조리에 대한 항복이라고 본다. 세계가 의미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유로 삶을 끝내는 것은, 부조리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도망치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는 삶을 미화하지도, 죽음을 금지하지도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의미 없음이 밝혀진 이후에도, 그 상태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태도가 가능하다고.
그래서 카뮈는 시지프를 이야기한다. 끝없이 돌을 밀어 올려야 하고, 정상에 도달해도 아무것도 남지 않는 형벌을 받은 인물. 완벽한 무의미의 상징이다. 그럼에도 카뮈는 말한다. 우리는 시지프를 행복한 인간으로 상상해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상황을 속이지 않고, 도망치지 않으며, 그 운명을 자각한 채 살아 있기 때문이다.
질문은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다. 삶에 명확한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안 뒤에도, 우리는 왜 죽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가. 의미가 없다는 전제를 받아들인 상태에서, 살아 있음은 어떤 태도가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을 회피하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것이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의 시작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