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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필 Jul 08. 2022

유치하고 고집스럽지만 솔직하게

#3 홍상수, 소설가의 영화(2021)

※ 이 글을 포함한 모든 글은 알게 모르게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기 변호이자, 고집스러운 다짐인

영화의 상영이 끝나고, 관객들의 반응은 대조적이었다. 홍상수의 영화는 언제나 상반된 의견의 중심에 있다. 효진(권해효)의 “사는 걸 고쳐보자”는 대사가 무색하게, 항상 사생활이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홍상수의 영화 말미엔, 개운함은 사치인 듯 보인다.


호평과 혹평이 대립각을 세우는 그의 영화 앞에서,

다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소설가의 영화>는 그가 비판받는 지점들을 넘어 그가 해오던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기점으로, 세간의 비판에 대한 부분적 성찰이면서, 할 수 없이 할 수밖에 없었다는 자기 변호이며, 그럼에도 하려는 것을 계속하겠다는 신념의 다짐이다. 유치하리만큼 고집스럽지만, 그래서 홍상수답고 그래서 좋다.


 <그 후>, <클레어의 카메라> 등에서 치기 어리게 자신을 비호하던 모습들을 걷어내고 <강변호텔>과 <인트로덕션>을 거쳐, 이 영화에선 영화인 홍상수로써 영화에 대해서 진득하게 이야기한다.

<소설가의 영화>는 “홍상수의 영화는 스토리가 약하다”, “이야기의 힘이 없고 영화 같지가 않다”는 비판에 정면으로 답한다. 오히려 이야기가 중요하지 않음을 반복적으로 말한다. 현대 미술사에서, 회화가 이야기성을 소설에게 완전히 넘겨준 것이 추상미술의 발족 이유 중 하나이듯, 홍상수가 영화에서 ‘갈등'이나 '이야기다운 이야기’를 제거하는 작업은, '홍상수라는 장르가 따로 있다'는 세간의 호평을 공고히 하려는 듯하다.


“그런 얘기 또 하자 그래? 그런 얘기 그만 좀 하자고!”

그래서인지, 색 빠진 화면 속 보이스 오버(voice-over)로 흘러나오는, 세원(서영화)의 대사가 흥미롭다. 유치하리만큼 고집스레 자신의 감독론을 펼치는 영화에서, 그는 무엇을 보여주고 말하고 싶었을까.


자,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는 이래요

홍상수는 그간 영화들에서 인물들의 입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말해 왔다. 극 중 캐릭터 중 누가 홍상수의 페르소나인가를 찾는 작업이 무용하게, <소설가의 영화>의 인물 모두는 그일 수 있다. <소설가의 영화>를 통해 감독은 인물들의 목소리를 통해 그가 무슨 영화를 만들고 싶고, 어떻게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지 이야기한다.

'말하자면 <소설가의 영화>는 홍상수의 "셀프 감독론"이다.'


그는 준희의 목소리를 빌려 “더 이상 소설(이야기)할 힘이 떨어졌다. 과장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작은 것을 부풀려야 하는 것 같은”, “마치 내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 행동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고백한다. 또한 효진(권해효)의 입을 통해 “사는 걸 고쳐보겠다”라고 일종의 반성을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세원을 통해 “남 눈치 안 보고” 예술을 하겠다는 소신을 밝히기도 한다.

또한 인물들이 모여 막걸리를 마시는 장면에서 “이야기가 이야기 같아야 한다”며, “이야기가 힘이 있어야 한다”는 만수(기주봉)의 이야기에 준희가 소리 높여 반박하는 부분에서, 영화에서 ‘이야기’가 가지는 의미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해 만수와 현우(박미소)의 대화에서 ‘이야기’는 바로 까먹기 일쑤인, “연기 같다”라고 이야기하는 부분도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한편, 극 중 준희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가장 편안한 상태에 두고 거기에서 나오는 어떤 것을 하고 싶다”라고 말한다. 이는 하마구치 류스케가 <해피아워>나 <우연과 상상>에서 보여주었던 작업과 닮아있다. '편집'이라는 의도를 제거하고 필연적 부자유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장면을 렌즈에 담아내는 것, 그 지점에서 느껴지는 재미를 관객과 공유하고, 영화만이 부릴 수 있는 마법을 스크린 넘어 전달하는 것. 류스케와 홍상수를 이야기하기 위해 서로를 거론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영화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준희가 사람들을 차례로 만나는 여정의 구조는 마치 영화를 만드는 과정 같아 보이는데, 극 중에는 영화를 기획하는 장면은 나오지만 영화를 촬영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시간을 건너뛰어 영화를 상영하는 날로 시점이 변한다. (길수가 술자리에서 잠들어 있다가 갑작스레 영화를 보러 가는 날로 장면이 전환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후 장면은 길수의 꿈으로 짐작해 볼 수도 있다.)

우리가 영화 속의 영화라고 믿는 장면은, 영화의 상영 장면이 아닌 영화를 찍는 과정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길수(김민희)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원래 출연하기로 한 남편이 아니고 영화를 촬영하는 사촌동생 경우(하성국)다. 홍상수가 영화 내내 이야기하던, 준희가 하고자 했던 영화는 우리가 봤던 그 장면이 아닌 것이다.


한편, 전망대에서의 준희와 효진의 대화에서 영화 제작 환경이 돈에 의해 완전히 자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어쩌면 길수가 보고 나온 영화도 결국 준희가 하고자 했던 영화가 아니었고, 영화 전체를 미루어 보건대 그렇게 찍힌 영화는 현재 영화 현실에서 어떠한 이유 때문이든 간에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소설가의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 이후 어두운 영화관을 빠져나오는 길수가 보인다. 길수의 표정이 어둡다. 영화를 보고 나온 길수의 표정이 어두운 것은, 길수가 보고 나온 영화는 준희와 길수가 하고자 했던 영화가 아니어서이지 않을까. 영화가 끝나고 그런 영화를 찍고자 했던 준희가 보이지 않는 점도 이를 방증한다.


길수가 옥상으로 올라가고 화면이 이내 어두워지며, 관객이 앉아 있는 극장 안은 밝아진다. 어두운 영화 현실에 갇혀 있던 관객이 영화의 끝에서 현실의 빛을 맞이한다. <소설가의 영화> 끝에 관객은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

유명한 평론가의 말마따나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 <소설가의 영화>의 장면과 대사를 곱씹으면서 “영화”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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