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필 Jan 17. 2024

<틱, 틱... 붐!>시간의 감옥에서 벗어나 한 걸음씩

#16 린-마누엘 미란다, 틱, 틱... 붐!(2021)

※ 이 글을 포함한 모든 글은 알게 모르게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건 조너선 라슨의 이야기예요. 8년 동안 작업했던 뮤지컬을 완성시키고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그의 29살 때 이야기죠. 조너선은 유망한 뮤지컬 작곡가로 서른 살을 얼마 앞두고 브로드웨이에 작품을 걸기 위해 무리하게 워크숍을 진행하는데요. 그 과정 속에서 돈이 부족해 앨범 등 소중한 물건들을 다 팔기도 하고, 작곡 압박에 시달리다 연인 수전과 헤어지기도 하고, 이성을 잃고 절친한 친구 마이클과 심하게 다투기도 하죠. 스토리 라인만 단순히 보면 (실화를 기반이라는 점에서 도식성에서 조금은 자유롭더라도) 성공을 위해 달려가는 젊은 예술가의 이야기를 다룬 익히 봐왔던 얘기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틱, 틱... 붐!>은 좋은 연출로 영화를 유려하게 끌고 갑니다.



여느 뮤지컬 영화가 그렇듯 노래와 정서가 극을 가득 채우는데요, 노래와 정서로 극을 이끄는 실력이 꽤나 발군이에요. 원 공연과 같은 형식으로 조너선이 이야기를 충실하게 전달함과 동시에 준수한 넘버들이 중간중간 영화를 지루하지 않게 끌고 가요. 리듬감이 훌륭한 영화입니다. 연출도 기발해요. 수전의 이야기를 현대무용 공연 장면에 녹이는 것은 상당히 인상적이었죠. 과하게 감정적이거나 과하게 낭만적이게 꾸미지 않아 극에 집중하기 좋았습니다. 오래간만에 만난 충실하고 상당한 뮤지컬 영화였죠.



시간의 감옥, 짜여진 삶


조너선은 서른 살이라는 나이에 집착합니다. 서른 살 생일을 앞두고 이상할 정도로 초조하게 일주일을 보내죠. 우리도 왜 서른 살이 되기 전까지는 서른 살의 우리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있잖아요. 서른 살이 되면 아늑한 집에서 단란한 가족들과 함께 주말을 보낼 것이다, 서른 살이 되면 직업적으로 뛰어난 성취를 거둬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어른이 될 것이다, 하는 것들이요. 이제 우리는 진실을 알죠. 심지어 서른 살이 안되어도 아는 것 같은데요. 그런 사람도 더러 있겠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그러기는 개뿔... 서른 살이 넘은 지 꽤 된 것 같은데 아직도 집에서 하는 것 없이 넷플릭스 보다가 마라탕이나 양념치킨을 시켜 먹는데 말입니다.


조너선 역시 막연하게 굉장한 서른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가 사회 진출이 빨랐던 20세기이기도 하고, 조너선의 부모는 30살이 되기도 전에 아늑한 집과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아이를 둘이나 기르고 있었거든요. 게다가 뮤지컬 <웨스트사이드스토리>와 <스위니토드>로 유명한 '스티븐 손드하임'은 27살에 브로드웨이에 데뷔했고, 이른 나이에 성공하는 예술가들을 미디어가 충실히 실어 나르니 조너선 입장에선 시간이 얼마 없다고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또한 조너선은 파티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본인을 '뮤지컬의 미래'라고 소개할 정도로 스스로에 대한 기대감과 자신감도 가득했어요. 대학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는 촉망받는 사람이기도 했으니 본인은 30살 전에 분명 성공할 거라고 믿었겠죠.



하지만 조너선이 공들여 준비했던 뮤지컬은 브로드웨이에 오르지 못하게 되었어요. 크게 실망을 한 조너선은 경제적으로 성공한 친구 마이클을 찾아가 일자리를 부탁하고요. '이틀 후에 서른이 되니까 본인에게는 더 이상 시간이 없어서' 뮤지컬을 포기한다면서 말이에요. 그의 좋은 재능을 알고 있는 마이클은 조너선은 설득하지만, 조너선은 계속 시간이 없다면서 투정을 부리죠. 그런 조너선에게 마이클은 말합니다 "나 에이즈 걸렸어." 지금과는 달리 에이즈에 걸리면 1년 내에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던 그 시절, 정말 시간이 없는 건 마이클이었죠. 조너선은 자신에게 시간이 없다고 믿었을 뿐이었죠. 아마도 남의 기준에 따라서요.


우리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누군가 정해 놓은 시간에 따라 당연하게 삶의 속도를 맞춥니다. 시간이라는 게 사실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개념이잖아요. 시간이라는 개념을 만들고 우리는 숱하게 그 시간에 속박되어 살죠. 마치 자기가 만든 감옥에 갇히는 것처럼요. 역시 우리 삶은 좀 모순덩어리입니다.


스무 살, 서른. 그런 시간 개념을 담당하는 부위가 두뇌 바깥 부분의 신피질입니다. 고양이는 인간과 다르게 신피질이 없죠. 그래서 매일 똑같은 사료를 먹고 매일 똑같은 집에서 매일 똑같은 일상을 보내도 우울하거나 지루해하지 않아요. 그 친구한테 시간이라는 건 현재밖에 없는 거니까. 스무 살이니까. 서른이라서. 곧 마흔인데. 시간이라는 것을 그렇게 분초로 나누어서 자신을 가두는 종족은 지구상에 인간밖에 없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나이라는 약점을 공략해서 돈을 쓰고 감정을 소비하게 만들죠. 인간이 진화의 대가로 얻은 신피질의 재앙이에요. 서른도 마흔도 고양이에겐 똑같은 오늘일 뿐입니다. - 드라마 <이번생은 처음이라> 中


조너선도 고양이를 한 마리를 키우는데요. 고양이한테 신피질의 지혜는 배우지 못했나 봅니다. 우리도 대부분 신피질의 재앙에 갇혀 살죠. 어떤 일을 어떤 나이에 해야 한다는 제언들이 최소 40~50년 동안은 인생의 커리큘럼처럼 짜여 있는데, 어떻게 50년짜리 커리큘럼을 다 맞추고 살겠어요. 한 학기 수업 커리큘럼 따라가기도 벅찬 우린데요. 따라가면 뭐 좋겠지만 아니면 뭐 어떤가요.

      


그래도 꾸준히, 계속해서



조너선은 첫 뮤지컬 작품 슈퍼비아 워크숍을 성공리에 마쳤지만, 결국 제작사의 자본 논리에 따라 브로드웨이에 진출하기는 힘들다는 말을 듣고 좌절합니다. 그리고 조너선은 제작사 대표인 로자에게 되물어요.

"전 이제 뭘 하죠?"


로자는 이렇게 답합니다.

"다음 작품을 써. 그게 끝나면 또 쓰고, 계속해서 쓰는 거지, 그게 작가야.

그렇게 계속 써나가면서 언제가 하나 터지길 바라는 거라고"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이죠

"다음 작품은 네가 잘 아는 것에 대해 써."



네가 잘 아는 것. 저에겐 이것이 '진짜 너의 것, 즉 네가 좋아하는 너의 일'이라고 들렸습니다. 매일매일 계속해서 하다 보면요, 계속 계속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간 뭐 하나 터지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또 어떻고요. 다만 나를 잘 알고 정말 내가 좋아하는 걸 해야겠지요. 다만 하루에 한 시간이나 삼십 분만이라도요. 오늘 역시 아침에 힘겹게 일어났을 텐데, 하루 중 잠깐이라도 좋아하는 일을 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도 챙긴다면 더할 나위 없고요.

 '틱, 틱' 돌아가는 신피질의 시계에서 벗어나 '툭, 툭' 매일 해야 할 것을 해나가다 보면 언제가 '붐'하고 뭐든지 나타날 테니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애스터로이드 시티> 삶의 의미 따위는 알 수 없대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