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인문학
첨단을 달리고 있는 의술이지만 환자에게 설명할 때에는 확률로 이야기한다. 의학이 수학처럼 정확한 과학이라면 문제의 정답이 딱 한 가지로 정해질 것이다. 하지만 오차 없는 정확한 진단에도 치료의 방법은 여전히 ‘정답’은 없다. 의학은 여전히 불확실한 과학이다. 수학 같다면, 정답이 있다면 그 정해진 답에 의문을 품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환자가 의사의 치료에 의심을 품는 것은 이런 불확실한 과학이 가진 한계 때문이다.
치아를 뽑거나 임플란트 시술을 받은 사람 중에서 뼈가 괴사 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MRONJ라고 부른다. 조금은 규모가 큰 치과에 전신질환 환자들까지 많이 진료해서 그런지 다른 의사들보다 난 유난히 그런 환자가 많은 편이다. 전에는 비스포스포네이트에 의한 턱뼈 괴사(Bisphosphonate-related osteonecrosis of the Jaw, BRONJ)라고 불렀지만, 최근에는 골흡수 억제제인 denosumab과 혈관신생억제제인 bevacizumab 등과도 연관되어 있다고 해서 약물에 의한 턱뼈 괴사(Medication–related osteonecrosis of the Jaw, MRONJ)라고 부른다. 처음 BRONJ가 보고된 것이 2003년이니까 내가 면허를 따고도 한참 지나서다. 학부 때 내가 배운 교과서에는 나오지도 않았던 것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환자에게서 나타난다. 골다공증약을 먹거나 주사를 맞는 분들이 정형외과에서도 치과 치료를 먼저 받으라고 권할 정도로 이제는 환자도 이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치과에 온다.
미국 의학연구소에서는 “정보를 잘 아는 환자의 선호”를 “질 높은 의료의 맨 위”에 두었다. 하지만 정보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의 의미가 좀 모호하긴 하다. 어떤 치료에 대한 부작용이나 수치적인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겠지만 수치의 해석은 늘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어떤 중병에 걸린 사람의 35%가 특정한 치료를 받고 완치되었다고 희망적으로 내원할 수도 있지만, 치료를 했음에도 65%의 환자는 죽었다는 비관적인 마음으로 내원할 수도 있다. 두 가지는 사실 모두 같은 정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같은 정보, 다른 전달 방법
MRONJ에 대한 최근 국내 정보는 아래와 같다.
- 국내 15개 종합병원의 공동연구자료에서 BRONJ의 빈도는 0.04%(1명/2,300명)로 추산
- 종양 환자에서 턱뼈 괴사의 유병률은 1.7%(0.9~3.1%)까지 보고
- 비스포스포네이트의 경우 대개 투약기간 4년을 기점으로 발병이 갑자기 증가.
이 정보를 토대로 환자에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암에 걸리지 않으셨다면 당신에게서 골괴사가 나타날 확률은 0.04%입니다. 그나마 약을 드신 지 4년이 안 되셨으면 더 안전합니다.” 정도일 것이다. 이 정보로 “거의 확률이 없기는 하지만 100%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당신한테 나타나면 확률은 의미가 없으니까요.”라고 말할 수도 있다. 같은 정보임에도 말하는 방법이 다를 수 있는 것은 의사의 마음에 달렸다. 환자에게 그 시술을 해도 괜찮을 것 같고, 또 하고 싶다면 전자를 말할 것이다. 하지만 부담이 되거나 리스크가 크다고 판단된다면 후자로 말하게 될 것이다. 환자의 의중을 알고 맞춰주고 싶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다. 결국, 같은 정보를 어떤 방법으로 전달하고 받아들이냐는 상황에 달렸다.
● 확률적 세계에 속한 의술
양자역학에 따르면 우리가 사는 세계는 근본적으로 확률적 세계다. 우리의 삶을 생각해 보면 많은 것들이 우연에 의해서 좌우된다. 하지만 인간은 비확률적 사고에 익숙해서 우연을 필연이라고 착각한다. 우리의 두뇌는 단 하나의 사례만으로도 인과관계를 추론하고, 그 결과가 당연한 귀결이라고 여긴다. 결과가 나쁘면 의사결정자를 탓하고, 결과가 좋으면 의사결정자를 칭찬한다. 그렇지만 확률적 세계에서는 좋은 결과가 좋은 의사결정을 내포하진 않는다. 좋은 결정을 해도 결과가 나쁠 수 있고 나쁜 결정을 해소 결과는 좋을 수 있다. 세상에 100%는 없다. 있다면 그것은 신의 영역이다. 그 영역을 벗어나면 오직 경우의 수와 확률만이 존재한다. 따라서 미래에 대해서 정확한 예측을 하려는 시도 자체가 부질없고 위험하다. 실패를 100%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우연을 노력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보는 환상이 있다. 하지만 우연은 피할 수 없다. 우연을 통제하려고 하기보다는 결과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는 것이 유리한 것이다. 불확실성으로 인한 실패에 너그러워야 하고, 중요한 것은 실패에서 배우고 수정하는 자세다.
이 이야기는 의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즉 아무리 치료의 선택이 옳았어도 결과가 나쁠 수 있고, 잘못 선택한 치료법에도 결과가 의외로 좋게 나타날 수 있다. 치료의 결과가 우연하게 나올 수 있다는 얘기다. 근거에 기반한 치료가 선행되어야 하지만 결과가 안 좋을 수 있다는 것을 의사도 환자도 예측해야 한다. 의술은 여전히 확률적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 확률을 높이기 위한 노력
구내염으로 고생하시는 환자분에게 교과서와 각종 세미나에서 권장하는 치료법, 약물을 써봤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하지만 어디서 누군가가 준 오일을 하루에 한 번씩 입에 머금었더니 급격하게 호전이 되었다고 한다. 오일에 의한 마스킹(masking) 효과로 증상이 조금 완화된 것 같이 보였으나 여전히 구내염은 있었다. 하지만 환자는 확실히 호전되었다고 느낀 모양이다.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완치될 확률이 거의 없다는 식의 말을 들었다면 환자는 분명 비과학적인 치료법에도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의학계에서는 검증되지는 않았지만 난치병에 특효가 있다는 주장이 종종 나온다. 몇 해 전 암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가짜 암 치료제를 수십억 원어치를 판매한 일당이 검거됐다. 무려 13년 동안이나 판매해왔다고 하는데 암 치료제의 정체는 톱밥과 깻묵을 달인 물이었다.(톱밥·깻묵 달인 물, 13년간 암 치료제로 판 7명 적발 | 연합뉴스 (yna.co.kr)) 피해자들은 주로 판매자들이 허위로 작성한 인터넷 후기를 보고 현혹돼 샀다고 한다. 이것이 효과가 있을 리 만무하지만, 이 가짜 약을 먹은 수많은 환자는 효과가 없음을 증명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13년 동안이나 장사를 할 수 있었다. 가짜 약을 구매한 환자 중 병원에서 받은 치료 때문에 혹은 저절로 호전된 환자들은 가짜 약이 효과가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암이 악화된 환자들은 ‘암은 치료가 어려운 병이니 나에게는 효과가 없나 보다’라고 생각해 약이 가짜라고 의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의심한다고 하더라도 자신만 효과가 없는 것인지, 약이 가짜인지 약을 먹은 사람들 스스로는 증명할 방법이 없다. 희망을 품고 오일을 입에 머금은 환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사이비 의술에 현혹된 환자를 탓할 것이 아니라, 의사인 우리는 그걸 선택할 수밖에 없는 낮은 확률에 밀려난 환자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삶은 확률을 높이기 위한 삶이다. 의사라면 내가 하는 치료가 환자에게 얘기할 때 조금이라고 높은 확률로 긍정적 방향으로 전달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삶. 그런 삶을 살고 있을 확률이 그래도 좀 높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