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인문학
몇 년 전 아프리카로 의료봉사를 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함께 갔던 의사 선생님이 침놓는 법을 배워서 잘할 자신이 있다고 하셨고 필요하면 쓰겠다고 침을 가지고 가셨다. 가기 전에는 그걸 사람들이 맞으려고 할까 걱정하셨지만, 현장에 도착해서 진료하기 시작했을 때는 반전의 상황이 벌어졌다. 그 침을 한 번이라도 맞고 싶어서 피부색이 검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진 것이다.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침을 맞고 앉은뱅이가 일어섰다는 정도의 소문이 퍼진 게 분명했다. 이미 그 지역에 중국 침술사가 진출해서 침에 대한 효용에 대해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듣게 되었지만, 의술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피부로 느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학창 시절 시기에 한의학은 인기가 절정이었다. 인기 한의예과는 최고 의예과와 비슷한 커트라인을 가질 정도였다. 사실 그런 인기를 누린 배경에는 ‘보건 의료의 위기’라는 화두를 등에 업은 어젠다가 있었다. 당시 나도 한의예과에 들어가려고 준비한 적이 있다. 한의학은 비과학적이라기보다는 더 ‘사람’에 집중하는 느낌이 들어서랄까? 지금 기준으로 보면 ‘질병’이 아닌 ‘환자’를 더 중요시하는 뭐 그런 분위기 말이다. 결국 진로를 바꿔 그것을 내 몸소 체험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 의료 인문학의 대두
근대에 들어서 의학의 관심 ‘환자’에서 ‘질병’으로 바뀌었다. 질병 연구 및 치료에 획기적인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질병과 싸우는 환자의 고통에 대해서는 전보다 관심이 소홀해졌다. 의사들은 환자를 돌보는 일보다 질병을 치료하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20세기 중반 들어 수명이 늘고 만성질환이 많아졌다. 의료비는 가파르게 증가 함에도 의료 성과는 기대한 만큼 나타나 지 않았다. 닉슨 대통령은 1969년 7월 기자 회견에서 처음으로 ‘보건 의료의 위기(crisis)’란 표현을 사용하였고, 뒤를 이어 의학의 효용성이 과대평가되었으며 생의학(biomedicine)이 한 계를 드러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대중은 낙관적으로 보던 의학의 발전에 대하여 처음으로 의구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효율성을 중요시하고 과학적 의학에 의존하면서, 환자들은 진료 현장에서 자신들의 가치관과 의견이 무시되는 일을 흔하게 겪게 되고, 흔히 말하는 ‘의료의 비인간화’나 ‘질병에서의 소외 현상’ 등을 자주 경험하게 되었다. 과학적 의학에 대한 믿음은 약화되고 환자의 권리 신장 주장하게 되었다. 바로 이 시기를 기점으로 대중은 의학의 발전뿐만 아니라 의료 윤리나 분배의 형평성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비과학적이라고 무시되었던 한의학이나 보완·대체의학 (complementary and alternative medicine)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상반되는 두 가지 방안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제시되었다. 첫 번째는 의학이 더욱 철저하게 과학적 의학으로 개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근거 중심 의학’의 구현을 목표로 임상적 효율성(clinical effectiveness)을 극대화해야 의료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의학의 위기가 과학적 의학을 추구하면서 나타난 ‘의료의 비인간화’와 ‘질병으로부터 환자의 소외’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들은 인문학 교육을 통하여 과학적 의학으로 편협해진 의학을 보완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근거 중심 의학(Evidence based medicine)’, ‘인문학적 의료’의 두 가지 근간이 지속되고 있는 배경인 것이다.
● 의료 인문학적 의사
‘의료 인문학’이란 용어는 1976년 호주의 외과 의사 무어 (A. R. Moore)가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수업의 목표를 의사직과 관련된 문제들을 논의하고, 문학 작품에 나타난 의학적 표현을 발굴하며, 인문학적 사고와 글쓰기를 배우고, 환자 돌보기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는데 두었다. 의료 인문학의 개념과 의학 교육에서의 역할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계속 변하고 있지만, 결국 좋은 의사 (good doctor)를 만드는 데 있다. 과학적 의학을 제안하였던 플렉스너는 과학의 방법론에 정통하고, 의학 지식이 풍부한 의사가 좋은 의사라고 주장하였지만, 과학적 의학에 반대한 피바디(Francis W. Peabody)는 “요사이 젊은 의사들은 질병 기전은 잘 아는지 몰라도 의료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거나, 혹은 지나칠 정도로 과학적이면서도 환자 돌보는 법에 대해서는 정통하지 못하다. 의사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관심이다. 환자 돌보기의 비결은 환자를 돌보는 행위 속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인문학적 의학 교육이 그런 의사를 만드는 것을 교육 목표로 삼고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환자 개개인의 개성이나 가치관의 차이를 인정하고, 의사소통 능력이 뛰어나 환자를 잘 이해할 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의료 경험이나 지식을 비판할 수 있는 사고 능력을 갖춘 의사를 말할 것이다.
의학이 과학적으로 발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의학과 보완·대체 의학 등에 환자들의 관심이 높아진다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하나의 아이러니일 수 있다. 이것은 근대 의학이 과학적 의학을 지향했지만, ‘질병’에만 열중한 나머지 ‘환자’의 고통을 소홀히 하여 나타난 결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의료의 비인간화’와 ‘질병으로부터 환자의 소외’ 현상은 최근까지도 여전히 심각한 문제로 지적받고 있다.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를 굳이 간단하게 말하자면, ‘성숙된 인간’을 위한 것이다. 의료 인문학적 의사는 결국 ‘질병’에서 ‘환자’로 그 중심을 옮아가려는 노력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질병’에 집중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 진정한 ‘환자’의 모습을 놓치게 된다면 의료 인문학적 의사는 되기 힘들 것이다. 물론 의사 모두가 바라는 모습은 아니겠지만. 그저 내가 제시하고 싶은 담론일 뿐일 수도 있다. 당신은 오늘 ‘질병’이 생각나는가, ‘환자’가 생각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