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석을 시작한 환자, 그 옆에 선 마음의 거리.
투석을 시작한 이후, 환자 분은 천천히 침상 밖으로 나가려는 모습을 보이셨다. 그 조심스러운 움직임 안에는 많은 마음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오늘은 다시 침대에 누워 계셨다. 바깥에 나가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았는지 조금 힘들어 보였다.
물론, 창가 쪽으로 몸을 돌려 햇살을 맞는 모습은 어딘가 평온해 보였고, 그걸로 충분히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직 움직이는 건 쉽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좋아지시는 것 같았다. 차도가 있다고 말해도 될 만큼의 작은 변화였다.
투석이라는 건, 단순히 기계를 통해 혈액을 여과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그 뒤로 따라오는 건 훨씬 많고 복잡하다. 식단 조절, 수분 제한, 영양 교육 등등.
그리고 가장 큰 산은 바로 동정맥루 수술이다. 지금처럼 목에 도관을 삽입해 투석을 하는 건 임시방편일 뿐이다. 감염 위험이 크고, 그 상태로는 평생을 살아갈 수 없다. 결국엔 팔에 혈류를 확보할 수 있는 수술을 해야 하고, 그 후에는 굵은 바늘 두 개가 팔에 꽂히는 과정을 일주일에 세 번씩 반복하게 된다.
당연히 환자 분들 입장에서는 그 수술이 두렵다. 통증이 무섭고, 바늘이 무섭고, 과정 자체가 “정말 평생 투석하는 사람이구나”라는 현실을 인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꼭 해야 하나요?” “이대로는 안 되는 건가요?”라고 자주 환자, 보호자 분들이 묻는다.
그럴 때 나는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말한다.
"네, 꼭 하셔야 해요."
그건 단지 의료적인 이유만이 아니다. 도관을 가지고 있으면 샤워도 할 수 없다. 감염의 위험 때문이다. 모두가 알고는 있지만, 막상 매일을 살아가다 보면 그 제한이 얼마나 답답한 일인지 몸으로 느끼게 된다.
평생 샤워를 하지 않고 살아갈 순 없다. 청결을 위한 행위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기본이기도 하니까.
그렇기에 수술은 선택이 아니라 과정 중 하나일 뿐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고, 불안을 덜어줄 수 있는 설명을 충분히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마취 크림을 바르고 투석을 시작하는 방법도 있다. 완벽한 해결은 아니지만, 고통을 줄일 수 있는 다른 길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환자 분은 덜 두려워할 수 있다.
조금씩, 천천히. 햇살을 맞으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그 모습처럼. 지금 이 길도 그렇게 지나가고 있다는 걸, 말없이 곁에서 지켜본다.
사실, 수술을 한다고 해서 곧바로 팔에서 투석을 시작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수술을 하고 나면 팔의 혈관이 충분히 굵어지고 튼튼해질 때까지 최소 6주에서 8주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보호자 분께 따로 설명을 드렸다.
"이번에 수술을 하신다고 해도 바로 팔에서 투석을 하게 되는 건 아니에요. 혈관이 성숙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해서 그동안은 그대로 도관을 사용해서 하실 거예요."
그리고 이어서 천천히 덧붙였다.
"나중에 팔로 투석을 하게 되면, 바늘 때문에 많이 아프다고 느끼실 수도 있는데, 그럴 땐 마취 크림 같은 걸 발라볼 수 있는지도 한 번 물어보셔도 괜찮아요."
그 말에 보호자 분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마음속에서는 이미 수십 가지 질문과 걱정이 떠올랐을 테지만 그저 짧은 침묵이 오갔고, 나는 그 사이를 조금 더 천천히 부드럽게 지나가고자 했다.
보호자 분은 늘 같은 표정이셨다. 환자 분이 괜찮아져도, 조금 힘들어 보여도 항상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무엇이 달라져도 힘들어하는 건 환자일 테니 그 어떤 방향으로 가더라도 마음이 편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마음을 내가 모르는 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해하지 못한다기보단 헤아릴 수 없다는 말이 맞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그 마음을 이해해?"라고 말하지만, 내가 느끼기엔 그 말 안에는 오히려 모순이 담겨 있다.
그건 이해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깊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함부로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는 거다. 그 차이를 늘 고민하게 된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 전혀 다르다.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건, 그 사람이 겪은 슬픔과 무게를 똑같이 짊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내가 그 무게를 짊어질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아닐까.
그래서 보호자 분의 표정을 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대신 안아줄 수는 없지만 그 마음을 함부로 가늠하지 않겠다는 작은 존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