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바라보는 자리에서 품은 질문들
2주 전, 나는 투석을 시작하고 수술을 앞둔 환자 이야기를 썼다.
그분은 여전히 병상에 계신다. 매일 마주하는 얼굴은 날마다 달라졌다. 하루는 웃으며 식사를 하시다가도, 다음 날에는 활력이 꺼져 있는 듯 보였다. 그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을 보며 자꾸 묻게 된다.
과연 언제쯤 이분은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까.
우리는 수술을 준비했다. 그러나 환자분의 컨디션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지 못했다.
결국 수술은 진행되지 못했고, 보호자분께서는 현재 가지고 있는 도관이 더 이상 기능하지 않으면 투석은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 앞에서 나는 잠시 멈칫했다. 투석이 환자에게는 생명을 이어주는 끈임을 알기에, 그 결정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환자와 보호자가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이기도 했다.
결국 그저 곁에서 지켜보며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할 뿐이었다.
누군가는 이 상황을 두고 “끝이 보인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직 그 환자분만큼 오래 살아보지 않았기에, 끝이나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더라도 실감은 나지 않는다.
환자분들은 대체로 의연한 태도를 보이신다. 그러나 자꾸 묻게 된다. 그 태도가 정말로 담담함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나는 이제 필요 없는 존재, 누군가에게 짐이 되는 존재이니 그만할 때가 된 것 같다’라는 마음의 그림자인 것일까. 그 경계를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환자분은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오히려 보호자가 더 힘들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이가 들면 사람은 결국 죽게 된다.
누군가는 오래 살고서 삶을 마무리하지만, 또 누군가는 터무니없이 짧고 허망한 나이에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종종 복잡한 생각에 빠진다.
그것이 그 사람의 팔자나 복이라는 말로 설명되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이 세상에서 허락된 시간이 다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걸까.
종교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죽음이라는 건 어쨌든 '허락된 시간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누군가의 죽음을 앞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시간을 어떻게 채워드릴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일 뿐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생각하면,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피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죽음도 그 중 하나다.
어떤 방식으로 애써도 피할 수 없기에, 오히려 사람들은 그 앞에서 무뎌지기도 하고, 반대로 더 깊이 이입할 수밖에 없는 건 아닐까. 나는 아직 그 답을 알지 못한다. 다만, 오늘도 환자 곁에 서서 그 질문을 마음속에 품을 뿐이다.
사람이 죽는다는 건, 병원 입장에서는 그저 ‘환자가 사망했다’라는 사실에 불과하다.
하지만 가족에게는 그것이 곧 새로운 삶의 시작이고, 적응의 시작이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단순히 나이에 달려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 가족이 본인에게 어떤 가치관을 남겨주었는지, 그리고 그 존재가 본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에 따라 극복해야 할 숙제의 크기가 달라지는 것 아닐까.
내일도 같은 자리에서 같은 얼굴을 맞이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크지 않지만, 작은 반복 속에서 환자와 보호자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덜 무겁게 만들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것이 지금 내가 환자 곁에 서 있는 이유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