샴팡, 너와의 인연

by 에포트리슬리

10년도 더 된 것 같다. 그때는 언니의 남자 친구이었던 지금의 형부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모엣 샹동 논빈티지 샴페인 한 병을 사주었다. 알코올 중독 유전자가 있는 나는 집에 보관해 둔 와인만 보면 먹고 싶어 침을 질질 흘린다.


냉장고에 넣어 둔 모엣 샹동을 보며 먹고 싶은 마음을 누르던 어느 아침.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혼자 살던 오피스텔 냉장고에는 안주거리랄 게 별로 없었고, 불편한 아침의 위장을 위로하기 위해 끌인 누룽지가 본의 아니게 안주가 되었다. 누룽지와 모엣 샹동! 이 페어링은 너무 너무 별로였다.


그 후로도 샴페인 포함 스파클링 와인은 별로 마실 일도, 굳이 선택하지도 않았다. 나중에 남친이 된 썸남이 출장에서 다녀왔다며 샴페인 한 병을 주겠다고 했다. 문자를 어떻게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여러 병을 사 온 것 같은 느낌에 “한 병만 주세요”라고 답을 했다가 딱 한 병만 사 온 것을 알고는 민망했다. 사실 그 샴페인이 그렇게 고가인지 그때는 몰랐다.


여하튼 집 근처까지 친히 왕림해 주신 썸남은 수줍게 고급스러운 직사각형 상자를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고급지다, 고급지다, 와인만 고급지냐, 상자도 고급지다.


와인 수업 때 들어본 브랜드인 돔 페리뇽이었다. 프리미엄 스파클링 제조 방식의 표준을 정립한 샴페인의 선구자, 돔 페리뇽이라는 프랑스 수도사의 이름을 딴 와인이다.


그 후로 남친이 된 그는 Krug 같은 고가의 샴페인을 가끔 선물해 주었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나는 샴페인을 포함한 스파클링 와인의 맛을 잘 몰랐다. 평생 위질환을 달고 살아온 탓일까 화이트 와인이나 스파클링 와인을 마시면 속이 싸~한 것이 불쾌감을 주었고 특유의 산미때문에 첫 모금부터 거북했다.


여하튼 비싼 샴페인이니 그 의미에 맞게 비싼 기회에 마시리라 다짐하며 냉장고에 보관해 두었는데…


같이 일하는 동료와 대판 싸운 날이었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동료인지라 매일 퇴근 때 택시를 같이 나눠 타고, 점심을 같이 먹고, 커피도 매일 마시러 함께 가던 사이였다. 그러다 사소한 오해가 큰 말다툼이 되어 한바탕 소란스러운 언쟁을 벌인 나는 울분이 터져 속이 부글부글했다.


퇴근하는 택시 안에서 1시간 동안 내 입장을 설명해 봤으나 소용이 없었다. 서로 감정만 앞세운 날카로운 말들을 내뱉고는 택시문을 쾅 닫고 헤어진 후에도 나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나니 더욱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열받은 김에 냉장고에서 버티고 있던 돔 페리뇽을 꺼내 들었다. 안주도 없이 잔에 따라 빈 속에 계속 원샷으로 잔을 비웠다. 우울한 기분을 달래려고 유료로 구매한 영화 화양연화를 틀어놓고 깡 샴페인을 먹다 보니 어느새 잠이 들었다. 자다 깨보니 이미 영화는 끝나있고, 허무하게 와인병만 덩그러니 나돌고 있었다.


15만 원 상당의 샴페인을 원샷에 깡샷으로 때리다니. 아까비…

와인에 입문한 후에 한동안 직업과 취미가 전도된 인생을 살았다. 1월부터 시작하는 와인 과정을 듣기 위해 한 달 여 런던에서 머물기로 결정하고, 일하던 프로젝트도 중간에 그만두었다. 시작 전 미리 양해를 구한 터라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미리 등록금을 내고, 한 달간 머물 플랫을 구해 두었다.


숙소는 와인 스쿨에서 최대한 도보가 가능한 위치를 선별하기 위해 내비게이션 앱으로 도보 거리를 측정한 후 선택했다. 와인 스쿨은 런던 브리지 역 인근에 위치해 있어 근처의 플랫 렌트가 아주 비쌌다. 당시 기준으로 월세 1,000만 원을 호가하는 곳도 많았다. 최대한 여러 곳을 뒤져본 끝에 5주 550만 원 정도의 원 베드룸 플랫을 구했다. 한 달 여를 살고 보니 버스 정류장도 가깝고 메인 스테이션 가기도 좋아 잘 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만족스러운 위치였다.


달 동안 수업을 듣고 3개의 시험을 치렀다. 첫 시험은 객관식이라 모든 시험 중 가장 쉬운 시험이었다. 객관식인 덕분에 채점이 빨리 끝나 2주 만에 결과가 나왔다.


Pass with Distinction.


나는 우쭐했다. 모든 과정이 끝난 마지막 5주 차에는 하루에 스파클링 와인과 주정 강화 와인을 동시에 치렀다.


런던에 머무는 한 달 내내 Hay Fever에 시달렸다. 무슨 조화 속인 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수강생이 번갈아 최소 하루 이상은 결석을 했고, 내내 감기와 콧물 같은 증상에 시달렸다. 다행히 나는 아파서 결석한 날은 없었다. 컨디션 난조 속에서 첫 시험 이후로도 빡센 시험을 2과목 (엄밀히 4과목이다. 각 과목별 시음, 이론 시음을 따로 치르기 때문이다)이나 준비하느라 정말 일생일대의 지옥을 맛봤다.


한 달 내내 시차 적응에 실패해 새벽 5시에는 너끈히 일어날 수 있었던 덕에 일어나자마자 아침 거리를 싸 들고 Cafe Nero에 가 커피 한 잔에 멍한 뇌를 깨운 후 공부에 몰두한다. 그리고 9시부터 5시까지 수업을 듣는다. 집에 돌아와서는 저녁을 먹고, 다시 공부에 매진한다.


아무래도 수백 명이 치르는 시험인지라 시험에 사용되는 와인은 아주 고가의 와인은 출제되지 않는 게 불문율이다. 그중 예외가 있으니 스카치위스키와 샴페인이다. 특히 스파클링 와인 과목의 경우 효모의 자가발효향 (2차 발효)의 유무를 구별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시음 능력의 벤치마크인지라 유명 샴페인 하우스의 프리미엄 샴페인이 종종 출제된다.


그나마 영국에서 구매한 덕분에 더 저렴한 값에 고급 샴페인을 구매해 시음해 본다. 보통은 시음할 때도 10만 원이 넘는 고가의 와인은 삼키지만, 와인을 삼키면 졸려서 공부를 할 수가 없어서 뱉을 수밖에 없다.

아까비~~~

이렇게 치열하게 한 달을 보내고, 모든 시험을 마친 후 귀국 편 비행기에 탑승했다. 언니의 마일리지 찬스를 활용해 비즈니스 클래스를 끊은 관계로 타자 마자 웰컴 드링크라며 그랑크뤼급 샴페인을 서빙해 준다. 아, 샴페인, 드디어 목구멍으로 넘겨 보는구나! 사실 같은 샴페인을 서울-런던 구간에서 마셔보았다. 그런데 샴페인 맛이 다르게 느껴졌다.


역시 지식이 감각을 리드하는 것인가?


잘 모르고 마실 때는 쓰고, 시고, 떨떠름하기만 했는데, 효모의 자가 발효에 기인한 구수한 맛과 향이 온 식도로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나도 모르게 울었다. 정말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한 달간 인종 차별에 시달리고, 휴대폰 도난 당하고. 공부하느라 매일이 좌절이었던 그 시간이 너무도 힘들어서 서럽게 울었다. 그리고 혼자 시음 연습할 때나, 수업 중 시음 때에도 매번 뱉어야 했던 내돈내산으로 공수할 수 조차 없던 비싼 샴페인이 아까워서 울었다.


그 이후로 나는 샴페인을 없어서 못 먹는 수준에 이르렀고 급기야 환장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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