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2학년 때 과 커플로 시작해 햇수로 13년을 만났다. 그 사이 내가 유학을 다녀왔고, 오빠는 군대를 다녀왔으니, 4년 여를 빼야 하나 말아야 하나? 빼든 더하든 10년 언저리의 기간을 만났으니 지인의 말을 빌자면 거의 결혼한 부부 수준이다.
나에게 두 번의 리즈 시절이 있었으니 그중 첫 번째는 대학 때이다. 여학생이 많지 않은 학부인 데다, 반수, 재수를 이유로 학교에 나오지 않는 여학생, 이미 커플이 된 학생을 제하고 나니 희소성의 원칙이 작동했다. 매일 점심, 저녁을 사주겠다는 동기, 선배가 부지기수였고, 심지어 교통비조차 대신 내 주니, 본의 아니게 지갑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날로 먹는 대학 생활이었다.
오빠는 나 보다 1년 선배였다. 나를 좋아하던 오빠의 절친이 군대에 가면서 나를 잘 살펴 달라 했다 한다. 너무 살피다 사랑에 빠질 때까지 잘 살펴버린 오빠는 어느 술 취한 밤 전화를 걸어 고백을 했다. 나는 적잖이 놀랐다. 지킴이로서의 그의 임무를 잘 알고 있었던 데다가, 친구를 그렇게 쉽게 져버릴 성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놀란 것은 놀란 것이고 오빠는 그리 내게는 매력적인 사람이 아니었기에 첫 대답은 당연히 No였다.
그 시절의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이 “그냥 친한 선, 후배로 남고 싶다”는 아주 진부한 변명으로 그에게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그럼에도 나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누군가 나에게 지극정성을 쏟으면 감동을 해 없던 감정도 생긴다. 첫 번째 고백 이후에도 한참을 내 주변을 맴돌며 물심양면으로 나를 챙기던 오빠에게 마음이 움직였고, 처음에는 내 감정에 자신이 없어 시한부 연애를 선포했다.
“좋아하는 감정이 남아 있는 동안만 사귀겠다”는 어이없는 선언을 했음에도 오빠는 흔쾌히 받아들여 주었다. 그때는 이 인연이 그렇게 오래 이어질 줄은 몰랐다.
대학 시절에는 그때의 대학생들이 주로 하는 놀이들을 하며 연애를 이어갔다. 커피숍을 가고, 맛집을 가고. 기념일을 챙기고, 가끔 다투기도 하고. 많이 웃고, 그 보다 조금 덜 울고. 그러면서 정이 들었고, 연애를 하면 결혼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던 그 시절의 나는 당연히 오빠와 결혼할 것이라 생각했다.
나와 사귀기 시작한 후 1달 만인지, 2달 만인지, 여하튼 연애 초반에 오빠는 군대에 잠시 입대했다. 자원해 두었던 공군입대일이 다가와 할 수 없이 입소했고, 다시 민간인으로 돌아왔다. 공군은 자원입대이기 때문에 훈련을 마친 후 귀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준다고 했다. “다시 곧 돌아오겠다”라고 했던 오빠가 정말로 돌아오던 골목길에서 부둥켜안고 울다, 웃다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 때문에 군대를 미루다 미루다 결국 서른이 가까워진 오빠는 할 수 없이 육군 일반병으로 입대를 했고, 경찰청 소속 전경으로 제주도에 배치되었다. 청천벽력, 날벼락같은 소식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지만, 매일 전화를 통해 들려오는 오빠의 하소연은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언제쯤 전화가 올까 기다리는 마음도 조마조마했고, 나이가 꽉 찬 상태에서 군대를 간 탓에 어린 선임들의 가혹행위나 놀림에 대한 하소연에 억장이 무너졌다. 내가 어찌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없어 너무 답답했고, 혼자서 그 힘든 시간을 감내하는 것을 지켜만 볼 수밖에 없는 내가 무력했다.
제주도에 자대 배치를 받은 후 6개월쯤 지났을까, 선임의 가혹행위로 오빠는 귀를 심하게 다쳐 성남에 있는 경찰 병원에 입원, 수술을 하게 되었다. 수술 후 비행기를 탈 수 없어 배로 오빠를 제주도까지 데려다주는 내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참담했다. 그 이후에도 한참을 오빠는 군대 생활로 힘들어했고, 이리하든 저리 하든 돌아가는 국방부, 아니 행안부 시계 덕에 제대를 할 수 있었다.
아마도 오빠에 대한 애정과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가 아닐까 싶다. 나를 항상 지켜주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는 모습에 매력을 느꼈던 나는 끝없이 이어지는 군생활에 대한 불만과 칭얼거림에 솔직히 진력이 났다.
나중에 생각해 보았다. 나라면 어찌할 방법도 없이 발만 동동 구르는 가족, 여자 친구를 위해 자신의 고통을 어느 정도는 감추고 스스로 감내해 내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매번 통화할 때마다, 휴가 때마다, 자신의 지난하고 녹록지 않은 군생활을 여과 없이 토로함으로써 지켜보는 사람들을 애간장이 녹게 했던 그의 미성숙함에 한참 지난 후에는 화가 났다.
군대와 공부를 모두 마친 그는 고시 낭인이 되었다. 사실 사법 시험을 권유, 아니 강요한 것은 나였다. 야심만만했던 나는 “사”자 붙은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나의 목표대로 오빠에게 고시를 볼 것을 종용했다. 오빠는 사법시험에 충분히 합격할 수 있을 만큼 똑똑하고 머리가 좋았지만 야심은 없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욕심, 돈을 많이 벌겠다는 세속적인 욕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래도 고시원에 들어가면서 매일 15시간 가까이 공부하고, 인강을 듣고, 가끔 당구를 치고, PC방에 가서 게임을 하며, 고시생의 역할에 충실했다.
오빠가 사법 시험을 준비하던 3~4년의 시간 동안 나는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조금씩 경제적 여유가 생겼다. 시험 준비하느라 고생하는 오빠를 위해 한약도 지어주고, 자전거가 그려진 고가 브랜드 옷도 많이 사 입혔다. 데이트 비용은 전부 내가 내는 것이 당연했고, 크리스마스나 기념일에는 값비싼 선물도 안겨 주었다.
사법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오빠는 끊임없이 힘들다, 지친다 푸념을 했다. 직장 생활을 하며 능력 있는 남자를 많이 접하게 된 나는, 상반된 모습만을 보여주는 오빠에게 지쳐갔다. 10년 이상의 시간을 함께 한 탓에 우리의 관계는 발전, 혹은 최소한 변화가 필요했다. 더 이상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영화 보는 사이가 아닌, 다른 관계로 나아가야 했지만, 그럴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았다. 나는 데이트가 점점 지루해졌고, 커피숍에서 졸거나, 영화를 보면서 자는 횟수가 늘어났다. 더 이상 그가 미덥지 않았고, 과연 이 남자를 믿고 내 평생을 함께 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그런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도 나는 몇 년을 더 관계를 유지했다. 힘든 공부를 하고 있는 오빠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었고, 나와의 이별로 그의 공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인내심으로 버틴 몇 해가 지나고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던 나는 이별을 고했다. 오빠는 매달렸지만 이미 비슷한 이별과 번복을 여러 번 경험한 나는 더 이상은 해볼 재간이 없었다.
오빠도 내가 본인에게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알았고, 우리를 잘 알던 친구의 말을 빌어 “너를 잡을 기회는 충분히 많았어. 그 기회를 놓친 건 다 내 책임이야”라는 말을 전하며 공식적으로 이별을 수용했다.
6개월 후에 전화가 한 번 왔던가? 매몰차게 다시 연락하지 말라고 끊었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흘러 결혼한다며 다시 전화했을 때도 잘 살라며 냉랭하게 통화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10년 정도 지난 어느 날 삼청동의 카페를 지나가던 중 카페 안에 있던 오빠를 우연히 본 듯도 하다.
그러나 헤어진 이후에도 여전히 이어지는 연이 있으니 바로 오빠의 부모님이다. 오빠의 엄마, 아빠는 우리가 사귈 때도 나를 엄청 예뻐하셨다. 헤어진 후 처음으로 오빠 엄마, 아빠가 전화하셨을 때는 며느리와 잘 지내시기를 바라는 마음에 매몰차게 굴었으나, 이제는 시간도 많이 지나 괜찮을 듯싶어 친절히 전화에 응대한다.
오빠와 만나는 동안 옷도 자주 사 주시고, 용돈도 넉넉히 주시고, 심지어 동생과 살라고 전셋집까지 구해주셨다. 받은 것만 너무 많고 해 드린 것은 별로 없었던 세월이었다. 그게 못내 죄송해 이제는 조금씩 챙기며 살려고 한다. 딸은 없고 아들만 달랑 둘 뿐인 두 분에게 살가운 딸이 되어 건강도 챙겨 드리고, 가끔 들여다보려고 한다.
누가 보면 참 이상한 인연이라고도 하겠다. 헤어진 옛 남자친구의 부모님과 연락하고 왕래한다면 모두들 이상히 볼 것도 같다. 하지만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는 말이 틀린 경우도 있음을 입증하고 싶다.
Non-Vintage 샴페인을 만들 때는 그 해의 Vintage 수확 포도에 일정 분량의 리저브 와인을 블렌딩 한다. 매년 생산되는 샴페인 하우스 스타일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생산량을 조절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간장을 담글 때 수십 년 된 씨간장을 같이 배합하는 원리와 유사하다고 할까? 오빠와 나의 관계라는 그 해의 빈티지에, 부모님이라는 이전의 리저브 와인이 블렌딩 되어 독특한 풍미가 발현되었다.
요즘 극장에서 상영되며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만약에 우리”라는 영화를 보았다. 모든 첫사랑 스토리가 서로 닮아있지만, 특별히 내 경험담과도 겹치는 부분이 많아 공감하며 보았다.
온 세상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사랑을 했고 그래서 나는 후회가 없다. 그때 그는 나의 집이 돼주었고 나도 그의 집이 되어 주었을 것이다. 서로 함께 있는 동안 꿈을 꾸었고, 나는 함께 있는 동안 꿈을 이뤄 직장인이 되었지만 그는 결국 남이 되고서도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애당초 그 목표는 ~사자 남편을 보겠다는 나의 목표였지만, 흔한 목표조차도 없는 그의 인생이 나는 너무 한심했다. 결국 나와 헤어진 후 강요된 목표마저도 부질없어 포기하고 작은 회사에, 본인의 전공과도 일도 겹치는 지점이 없는 IT 회사에 들어갔다고 들었다.
두 연인이 다시 만나 옛날을 회상하며 그때 서로를 붙들었다면 어땠을까 하며 우는 장면보다 나는 마지막 남자의 아버지가 심정적 며느리였을 여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눈물이 터졌다. 올해만 해도 이런저런 질환으로 다섯 차례 입원을 반복한 옛 남자 친구의 아버지 때문에, 여러 차례 통화할 기회가 있었다.
오빠의 아버지가 작년, 올해에 걸쳐 대여섯 번은 족히 입원하신 것 같다. 올해도 척추 문제와 신장, 심장, 폐 문제가 겹쳐 오래 입원을 하시게 되었다. 그 때문에 오빠의 어머니와 나는 전화로 제법 긴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아버지의 부재로 설 명절은 혼자 쇠시느냐 물으니, 그렇단다. 자식들이 싹수가 없다고 내가 한 소리 하니, 어머니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큰 아들 (=오빠)도 결혼 이후 더 싸가지가 없어졌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오빠가 이혼하고 나랑 살았으면 좋겠다 하신다. 어머니가 솔직하시니, 나는 더 솔직해진다.
"나는 오빠 싫어요. 오빠가 탐났으면 그때 채갔을 거예요."
잠시 당황하시던 어머니는 금세 호탕한 웃음을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