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졸레 누보(Beaujolais Nouveau)
솔직히 보졸레 누보는 나의 와인 이상형은 아니다. 나는 영 (Young)한 와인보다는 숙성된 와인이 좋고, 1차 향이 강한 프루티한 스타일 와인보다는 복합적인 풍미의 3차 향이 발현된 와인이 좋다.
영하며, 프루티한 1차 향 위주의 가벼운 와인. 이 모든 특징을 다 가진 와인이 보졸레 누보이다. 1990년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누린 보졸레 누보는 아주 고가 와인을 제외하고, 이례적으로 항공 운송되는 와인이다. 매년 11월 셋째 주 목요일에 전 세계에서 동시에 출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보통 와인은 무게가 많이 나가기 때문에 선박운송을 많이 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케이스이다.
보졸레 누보 (Nouveau = New)는 이름처럼 그 해 생산된 빈티지 와인으로 프랑스 현지뿐 아니라 일본등 전 세계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와인이다. 마케팅의 승리라 하면 샴페인을 들 수 있지만, 이 보졸레 누보도 만만치 않다.
생산자들 입장에서는 몇 년을 숙성시켜 판매하는 스타일의 와인은 비용 부담이 크다. 오크통 값도 비싸지만 와인을 보관할 공간도 많이 차지한다. 더구나 숙성 기간 내내 주기적으로 숙성 상태를 확인해야 하고, 와인이 변질되지 않도록 점검해 주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이 인건비요, 기회비용인 것이다.
피노누아, 샤르도네 프리미엄 산지로 유명한 버건디 남부 밑자락에 위치한 보졸레에서는 가메라는 품종이 많이 재배되는데, 이 가메 품종은 피노 누아처럼 숙성에 아주 적합한 고급 품종은 아닌지라 (이론의 여지는 있을 수 있겠다) 마을의 생산자들은 그 해 만든 와인을 바로 마시는 것이 전통이었다 한다. 음료수처럼 술술 넘어가는 가벼운 과일 풍미가 이 스타일의 최대 장점이다. 더구나 생산자들은 바로 생산해 캐시 플로우를 확보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수입원은 없었을 것이다.
Le Beajolas Nouveau est arrive!
굳이 번역하자면 보졸레 누보가 왔어요! 정도 되시겠다.
매년 이 슬로건을 걸고 전 세계에서 동시 출시해 즐기는 이 왁자지껄한 마케팅으로 한동안 보졸레 누보는 많은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최근의 와인 트렌드는 좀 더 복합적인 풍미의 와인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보졸레 누보의 인기는 전 세계적으로 감소하는 추세이다. 다만 근래에는 보졸레의 10개 크뤼에서 가메를 기반으로 보다 복합적인 풍미의 와인들, 혹자는 버건디 피노 스타일과 흡사하다고 평가하는 와인 스타일이 각광을 받고 있다. 가격대도 버건디 빌라주급 와인에 필적할 만큼 좋은 시장의 평가를 받고 있다.
보졸레 누보하면 나는 전 직장에서 업무 상 만난 나의 인간 이상형이 기억난다. 나는 마른 체형에, 수더분한 인상의 남자를 좋아한다. 성품이 진중하고, 매너가 있으며, 말은 많지 않으나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이상형이다.
솜분은 태국 중앙은행에 근무하던 관료였다. 금융기관 고위관료를 위한 연수 프로그램에 참석했던 인연으로 알게 되었다. 연수 프로그램 총괄 책임자였던 나는 솜분이 나의 이상형과 너무 근접해 깜짝 놀랐다. 솜분은 외모만 보면 영락없이 한국사람처럼 생겼다. 당시 우리 부서 차장님과 형제라고 농담할 정도로 닮았었다. 그냥 아무 말 안 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한국말로 말을 시킬 정도였다.
솜분은 부잣집 자제임이 분명했다. 대학을 미국에서 마쳤으며, 태국인치고는 유려한 영어를 구사한 데다 매너도 너무 좋은 것을 보면 좋은 집안 금수저 출신인 것으로 보였다. 나보다 12살 위 띠동갑이었던 솜분에게 한 가지 단점이 있었으니 이미 결혼을 해 가정을 꾸렸다는 것이다. 방콕댁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아쉬움을 뒤로하고 나는 일찌감치 노선을 치정 멜로가 아닌 남사친 우정 노선으로 선회하고 솜분과 친분을 쌓았다. 자칫 허투루 보였다가는 솜분과 같이 온 태국팀 여자 관료에게 머리카락을 잡힐 가능성이 아주 농후했다. 솜분 와이프의 친한 친구인 데다 덩치가 아주 커서 나 정도는 쉽게 제압할 수 있을 비주얼의 태국 부자 언니였기 때문이다.
솜분과 연수기간 내내 말이 잘 통해 친하게 지내다 경주 필드 트립 중에는 죽이 잘 맞았던 캄보디아 재경부 관료와 셋이 보졸레 세 병을 깠다. 공교롭게도 그 주가 11월 세 번째 목요일인지라 투숙 호텔에서 보졸레 누보 행사를 했기 때문이다. 와인을 아주 좋아하는 솜분을 위한 나의 한턱이었다.
그로부터 한 10년이 지났을까, 친구들이 호텔을 제공하겠다며 방콕 방문을 제안해 방콕 여행을 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솜분과도 연락이 되어 저녁을 함께 하기로 했다. 호텔에 픽업 온 솜분과 반가운 인사를 나눈 후, 솜분 차의 운전석 옆자리에 앉으려 하니 솜분이 만류하며 뒷좌석에 타란다. 순간 나는 당황했다. 결혼한 사람이라 이성 친구가 조심스러운 것은 알지만, 너무 유난스럽게 경계하는 것 같아 좀 민망했다. 잠시 후 솜분도 뒷자리에 탄다. 그제야 앞자리에 기사가 탄 것을 보았다. 역시 있는 집 자제, 아니 아재였어!
방콕의 유명한 로컬 식당에서 쏨땀에 맥주를 함께 마시며 묵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솜분은 내가 와인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하자 반색하며 관심을 드러냈다. 묵은 우정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어색하지 않다.
올해도 11월 셋째 주 목요일이면 어김없이 보졸레 누보는 출시되겠고 수입사는 매년 같은 슬로건을 내걸고 보졸레 마케팅 행사를 진행할 것이다. 나의 이상형인 친구와, 이상형은 아니었으나 꼽사리를 잘 끼던 캄보디아 친구와 함께 마신 보졸레 누보. 내 와인 이상형은 아니지만, 그날의 유쾌한 수다는 두고두고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맛있으면 0 칼로리라던데, 좋은 사람과 마시면 무알콜인가? 30명 남짓의 연수팀과 동행한 터라 만찬을 겸해 같이 마신 소주, 맥주 조합의 전작이 있었던 데다 와인까지 섞어마신 우리 셋은 그날 헤롱한 상태에서 각자의 방에 돌아갔다. 다음 날 제시간에 멀쩡히 나온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그날의 분위기, 재미났던 대화, 왁자지껄 했던 분위기 모두 그립지만 오롯이 보졸레 누보 2병을 혼자 비웠음에도 말짱했던 나의 간과 위장이 가장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