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of Wine 시험을 준비할 때 거의 100% 못 맞춘 와인이 몇 있다. 화이트, 레드를 불문하고 블렌딩 와인은 특히 맞추기가 난해했다. Semillion, Sauvignon Blanc을 블렌딩 한 보르도 화이트 역시 그렇다. Course Day 뿐 아니라 정작 Stage One 시험에도 출제되었는데, 향이 너무 화려해 아르헨티나의 화이트 품종인 Torrontes라고 생각했다. 이러니 시험에 똑떨어지지~ 평소에 자주 마시거나 좋아하는 품종/블렌딩도 아니거니와 몇 번을 틀리고 난 후에도 블라인드 시음을 하면 감조차 잠지 못했다.
시험도 떨어졌겠다, 더 이상 공부할 것이 없어 시간이 많아진 참에 연락이 끊긴 몇 사람을 접촉해 보았다. 은이 언니의 경우 휴대폰 번호가 삭제돼 방법을 찾다가 구글 검색을 해 보았다. 언니는 전공 분야에서 비교적 유명세가 있는 사람인지라 현재의 근황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같은 기관에 일하는 지인을 통해 업무용 전화번호를 받고 휴대폰 키패드에 번호를 누른다.
전화는 단 한 번 만에 연결되었다. 관등성명을 밝히자 바로 반가운 언니의 목소리가 귀에 꽂힌다. 언니의 첫 물음은 “결혼은 했니?”였고, 나의 첫 질문은 “이혼했어요? 였다. 언니가 남편과의 갈등으로 힘들어했던 기억이 나기도 했고, 어색한 서로의 시간을 넘기 위한 농담이기도 했다. 언니는 “법원에 갈 시간이 없어서 아직 이혼하지 않았다”라고 특유의 유머 감각을 살려 답했다. 그에 나는 “구청에 혼인 신고하러 갈 시간이 없어서 못했다”라고 화답했다.
언니와 나는 웹사이트 도메인명이 go.kr로 끝나는 기관에서 같이 일하면서 알게 되었다. 전철역에서 회사가 차로 5분 정도 떨어져 있어, 출근 셔틀을 놓치는 게으름뱅이들은 종종 택시를 같이 나눠 타고 출근하는데 그날 언니와 나 포함 3명의 여자가 합승을 했다.
거의 회사에 도착한 즈음 쿵 하고 택시가 승용차와 충돌을 했다. 어떤 상황에서 사고가 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위기 상황에서 지극히 침착한 나는 택시 운전기사의 연락처를 받고, 택시 번호판 사진을 찍은 후 은이 언니와 나란히 근처에 있는 중소 규모 병원에 입원을 해 이것저것 검사를 받는다. 검사 결과 상 별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언니와 나는 퇴원했다. 그때의 인연으로 가끔 만나 점심도 먹고, 저녁에는 소맥이나 와인을 같이 마시곤 했다. 업무 중간 잠깐씩 만나 수다를 떨기도 했다.
언니는 성격이 아주 화끈해 나와 잘 맞았다. “맛난 음식을 먹기 위해 사는” 인생의 가치관도 같았다. 차로 15분을 가야 하는 을밀대에 11시까지 자리를 잡기 위해 10시 40분에 득달같이 나올 수 있는 몇 안 되는 용감한 여자 중 하나였다.
나와 연락이 끊긴 사이에 언니는 와인을 아주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추진력이 끝장인 언니가 예약해 놓은 와인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언니의 얼굴은 신당동 피부관리실 원장의 살핌으로 반질반질 윤이 났다. 빈말인지 참말인지, 언니는 나에게 하나도 안 변했다고 했다. 그렇게 세월을 거스른 우리는 밀린 대화를 나눴다.
언니는 내가 아는 이들 중에서도 첫 번째, 두 번째 손가락에 꼽을 만큼 삶을 사는 자세가 건전하고, 배울 것이 많으며, 강단이 있는 여자다. 듣자 하니 언니의 아버지는 공무원으로 마당 있는 집 (아마 꽤 큰 집이었으리라)에서 살았다 한다. 어려서부터 계단 청소, 마당 청소는 언니의 소임인지라, 언니는 이런 잔일이 아동학대에 가깝다고 느꼈을 만큼 고단했다고 한다. 그래서 손이 갈 것이 없는 아파트를 너무 좋아한단다.
여성학을 공부하고, 사회 운동을 하며, 박사학위자인 언니는 생산직에 근무하며 같이 노동운동을 했던 형부를 만나 결혼을 했다. 형부의 알코올 중독과 주사로 인해 언니는 상당한 고통의 시간을 겪었다고 했다. 솔직함이 주특기인지라 별로 자신의 상황을 공유하거나 내보이는데 주저가 없던 언니가 해 준 이야기이다. 갑상선 암으로 수술을 했고, 그때 받은 암 보험금이 언니의 가정을 일으키는데 큰 보탬이 되었음을 아주 유쾌하게 자랑할 줄도 안다.
인생의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그늘이 없고, 그 고통을 적당히 희화할 줄도 아는 유쾌한 언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가볍게 여기는 성격이 아니다. 적당히 진중할 줄 알고, 적당히 가벼울 줄 아는 언니이다.
오랜만에 만난 저녁 자리에서는 언니가 고른 바르바레스코와 내가 고른 보르도 화이트 올드 빈티지를 마셨다. 보통 바르바레스코는 바롤로에 비해 그 무게감이 가볍고 탄닌도 라이트 한 편인데 이 바르바레스코는 어지간한 바롤로 찜 쪄 먹을 만큼 바디감, 복합적 풍미가 좋은 와인이었다.
내가 보르도 화이트를 고른 것은 이미 한 병을 마신 후인지라 위장 여건 상 하프 보틀이 적당했기 때문이다. 하프 보틀은 종류가 몇 되지 않았다. 별다른 선택지가 없어 골랐지만 열 살이 넘은 보르도 화이트를 마셔본 기회가 없어 호기심이 생겼다. 잔에 안긴 와인은 흡사 쉐리 와인 같았다. 소비뇽 블랑 특유의 향은 거의 묻히고, 세미용의 산도도 길이 들어, 말린 과일, 카레, 향신료와 같은 풍미가 도드라졌다. 기분 좋은 드라이한 쌉싸래함이 이채로웠다.
은이 언니의 삶은 이 올빈 보르도 블랑과 닮았다. 화려한 향이나 쏘는 산미처럼 톡톡 쏘는 인생은 아니었을지언정, 언니 인생은 충분히 빛났고 충분히 무르익었다. 화이트 와인의 과실 풍미는 병 숙성을 통해 말린 과실 풍미로 발전하고 색도 진한 레몬 빛을 띤다. 색상은 마치 소테른과 같은 스위트 와인처럼 진하다. 경쾌하지만 가볍지 않고 진득하지만 무겁지 않은 풍미. 언니의 인생도 이렇게 균형 있게 더욱 익어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