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2022 10. 26일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영화이다. 기자 찰스 그래버가 실제 인물인 찰스컬린의 살인 사건을 취재를 바탕으로 출판한 책인<그남자, 좋은 간호사>를 원작으로 했는데 토비아스 린드홀름이 연출하였다.
범죄스릴러물은 대체로 범인은 누구인가? 범죄의 원인은 무엇인가? 범인을 어떻게 체포하는가?를 주로 다루는데 이 영화는 범인은 어떤 사람인가?에 집중한다.
범죄물은 흔히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처럼 오리무중인 범인 찾기 게임을 전개 시키곤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범인, 찰스 칼린(에디 레디메인)은 예측가능하고 그 예측이 너무 쉬웠기에 혹시나 반전이 있을까 했지만 역시나 반전은 없다. 반전 없는 스릴러 영화라니? 이는 실제 사건에 기반을 두었고 그 범인의 실명을 사용하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보여진다. 그건 범인은 누구인가 보다는 범인은 어떤 사람인가를 묘사하는데 주안점을 두었기에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존재한다. 이는 이 영화의 관심이 범행 수법이나 범인 잡기가 아님을 암시한다 고 볼 수 있다.
범죄의 원인은 살해 동기도 포함하지만 그 보다 훨씬 넓은 개념이다. 범죄스릴러는 최민식 전도연 주연의 <해피엔드>처럼 범죄의 원인이 주가 되는 영화가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찰스 컬린은 자신의 범죄 동기를 결코 밝히지 않는다. 감독도 원인에 대한 강박관념이 없는 듯 하다. 범인이 살해 동기를 밝히지 않은 것처럼 감독도 범죄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이점이 이 영화의 미덕이다. 관객의 숙제로 남겨 놓은 것이다. 이로써 관객은 범죄의 원인을 추측하고 해석해야만 한다. 달리 말하면 감독은 관객에게 원인을 강요하거나 윽박지르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원인일 수 있고 아무 것도 원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감독의 생각이 반영된 것 같다.
범죄 스릴러 영화는 유영철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추격자’>처럼 범인을 잡는 과정, 추격과 도피, 긴장감 넘치는 서스펜스에 집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 그런 숨바꼭질은 없다. 범인과의 숨막히는 두뇌 싸움도 격렬한 추격씬도 없다. 추격과 도피 없는 범죄영화이다.
물론 체포하는 과정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의외이다. 이 영화의 반전이자 클라이 맥스라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주제이고 주요한 스포일러 이다.
이 영화는 범인은 어떠한 사람인가를 묘사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하지만 그의 과거나 개인사는 극히 간략하다. 남자 간호사이며 이혼하고 혼자 사는 그는 가끔씩 자신의 아이를 만날 뿐이다. 극히 외롭다는 표현은 하지 않지만 극히 외로운 남자라는 사실은 읽을 수 있다. 또한 그가 싸이코 패스라든가 분노조절장애가 있다든가 하는 모습은 영화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직접 실행하는 범행장면도 없다. 오히려 심장병으로 고통받는 에이미와 그녀의 두 딸을 살뜰히 챙긴다. 감독은 연쇄살인범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만을 보여준다. 감독의 의도는 무엇일까?
이 영화는 극적 요소나 과장이 없다. 짜내기도 없다. 범인에 대한 편견을 심어주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노력한다. 카메라는 객관적 시점과 거리를 유지한다. 범인을 잡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에이미(제시카 차스테인)도 무조건 영웅시 하지 않는다. 홀로사는 그녀 또한 두 딸을 부양하기 위해 의료보험 문제로 병원측을 속여야만 한다. . 병원측의 냉혹한 처사, 형사들의 헌신 뿐만 아니라 무능한 모습도 여과없이 보여준다. 우리가 처한 현실처럼 영화속에 완벽한 악마도 완벽한 천사도 없다. 스릴러 영화를 기대했던 사람에게는 실망이겠지만 이 사건을 냉정히 평가해 보고 싶은 관객들에게는 바람직한 연출이다.
뉴저지주의 파크필드 기념병원 310호실의 애나 마르티네스 환자가 사망한다. 연이어 어린 딸을 둔 켈리라는 환자도 사망한다. 경찰이 강도강간을 저지르는 만큼이나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 의사나 간호사가 환자를 죽이는 일일 것이다. 도둑에게 금고 맡기는 꼴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병원내에서 입원중, 그것도 중환자가 사망한 경우 유족들은 이것이 정상적인 치료과정인지 범죄인지 식별해 내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모든 증거를 병원측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설사 증거가 있다하더라도 거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의사의 고의 과실을 입증해야 하고 막대한 비용을 들여 병원측을 상대로 기나긴 법정 투쟁을 해야하는 문제가 남아있다. 가난하고 힘없는 피해 유족으로서는 알면 병이 되는 그저 첩첩산중일 뿐이다.
병원의 비협조는 예상된 결과이다. 자신들의 형사 민사 책임외에 직원인 의사와 간호사를 보호하고 환자들의 신뢰을 잃고 싶지 않은 본능의 발로이다. 영화는 병원의 비협조 문제와 범죄은폐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그들은 찰스 컬린의 범죄를 눈치 챘으면서도 그를 다른 사소한 문제를 걸어 해고시키고 일을 조용히 마무리 한다. 그가 거쳐간 거의 모든 병원이 이렇게 해결하였다.
병원내에서 살해당한 두 환자는 모두 여성 환자이고 중환자이며, 끔찍이 사랑하는 남편과 가족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여기서 영화에 명확히 나타나지 않은 찰스컬린의 범죄의 동기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찰스컬린이 화목한 가정의 여성을 증오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중환자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자신만의 아집과 편견을 엿볼 수 있다. 이점에서 그는 악행을 저지르고도 죄의식이 없는 악의 평범성을 엿볼 수 있다.
식칼기계가 광어에 배치될 때는 횟감을 생산하나 강도의 손에 접속될 때는 범죄가 발생하듯이 범인과 병원, 에이미는 어느 것과 접속하느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
연쇄살인범 찰스 칼린이 화목한 중환자 여인에 배치되면 연쇄살인범이 된다. 그가 에이미와 그녀의 두 딸에 접속되면 자상한 남자친구와 보호자가 된다. 어느 것에 접속하느냐에 따라 그는 천사와 악마사이에서 줄을 탄다. 이중 어느 것이 그의 본 모습인가? 어느 쪽이 그의 진정한 자아, 아이덴티티일까?
병원이 일반환자에 배치될 때는 생명의 은인이자 천사로서 기능한다. 모든 병원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이 영화속 병원은 자신의 내부 직원의 범죄와 접속되자 얼굴을 바꾼다. 피해자의 구제와 범죄자 처벌이라는 정의는 과감히 내팽개쳐 버리고 은폐와 침묵 부인의 길로 들어선다. 오로지 꼬리자르기로 해당 직원을 다른 이유를 들어 해고하고 만다. 그뿐이다. 진실이 드러나면 손해배상해야 하고 병원의 신뢰도 저하에 내원 환자 수가 급감할 뿐이기에 비 영리를 생명으로 하는 병원이 영리 앞에서 그 가면을 드러내는 것이다. 영화속 병원만 그런다고 믿고 싶을 뿐이다.
심장병을 앓고 있는 에이미는 해고의 두려움에 병원을 속인다. 거기다 자신을 위해 심장약을 절도하는 찰스 컬린의 행위에 눈을 감는다. 그러나 컬린이 환자를 살해 했다는 증거를 확인한 후 그녀는 그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형사와 합동작전을 펼친다.
이처럼 에이미는 자신의 심장병과 결합하면 두 딸을 부양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자이지만 연쇄 범죄자와 배치되면 정의의 수호자가 된다. 그녀는 혈당이 잘못되었다며 누군가 이중 약물 치료로 인해 인슐린을 주입했다는 것을 경찰에게 알려준다. 이는 범인 체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영화속 주요 등장인물 모두가 이중성 상대성을 보여준다. 어느 것이 진짜 모습일까? 어느 면이 진정한 자아이고 정체성(identity)일까? 둘중 하나는 가면이고 하나는 진짜일까? 둘다 가짜일 지도 모르듯 양쪽 모두가 진짜 얼굴일지도 모른다. 이는 타고난 본성이나 자아는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상황이 어떠하냐? 어느 것에 접속하느냐? 어느 것에 계열화하느냐? 이에 따라 사물의 성격이 바뀌듯이 인간도 마찬가지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이로써 타고난 단일한 인격이라는 자아의 신화인 근대의 스캔들은 무너진다. 인간의 이중성, 삼중성이야 말로 진실한 인간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병원마다 해고 당하고 전전하던 찰스는 파크필드 병원에서 에이미를 만난다. 파트너가 된 에이미는 그에게 따스하게 대해준다, 그녀의 호의에 찰스 역시 혼신의 정열로 심장병으로 고통받는 그녀를 돌본다. 아내와 이혼하고 아이들과도 떨어져 사는 찰스 컬린은 결국 에이미에게 사랑을 느끼고 그녀의 두 딸을 살뜰하게 보살핀다. 연쇄살인범에 어울리지 않는 행로이다. 이는 어디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떠 돌다가 자신을 사랑으로 인정해 주는 에이미를 만나 비로소 그는 자아 성취감과 행복감을 느낀다. 찰스의 에이미에 대한 사랑이 진심이었음은 그녀의 설득에 주저하고 회피하던 그가 마침내 응답함으로써 입증된다.
에이미의 설득에 의한 컬린의 자백은 사랑 결핍증이, 그 누구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의 연쇄 살인 범죄의 강력한 동기이자 원인임을 암시한다 하겠다. 이는 그가 싸이코 패스나 특별한 흉악범의 범주에 드는 것이 아니라 그도 보통 사람과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겠다. 이와 관련하여 감독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 영향을 받은 듯 하다.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은 독일계 미국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1963년 저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제시한 개념이다. 홀로코스트와 같은 역사 속 악행은 광신자나 반사회성 인격장애자들이 아니라 국가에 순응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보통이라고 여기게 되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다고 아렌트는 주장했다.
1960년, 이스라엘의 첩보 기관 모사드가 나치 독일의 친위대 장교 겸 홀로코스트의 실무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압송하였다. 그 후 아이히만은 기소되어 1961년 4월 11일 공개재판이 열렸는데, 이를 참관하던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에 대한 평론을 작성하여 책으로 출판한 것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이 책이 충격적인 이유는 수많은 학살을 자행한 아이히만이 아주 사악하고 악마적인 인물일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매우 평범했다는 점이다. 아이히만은 개인적으로는 매우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엄청난 학살을 자행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해서 그녀가 내린 결론은 바로 악의 평범성이다. 악의 평범성이란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고 평범하게 행하는 일이 악이 될 수 있다"라는 것이다.
이처럼 악이 특별히 악마적인 어떤 것에 기원하는 게 아니라는 아렌트의 주장은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고, 이 책이 출간된 후 수많은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아렌트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자신이 기계적으로 행하는 일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않는 무사유(thoughtless) 그 자체가 바로 악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아이히만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자신의 기계적으로 행하는 일을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않는 것은 악으로 이어질 수 있다.
책이 발간된 후 아렌트의 주장에 대해 많은 역사학자들이 반론을 제기했다. 반론 내용은 아이히만은 결코 명령에만 충실하게 따르는 "평범한" 관료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아이히만은 반유대주의 성향을 보이는 급진적인 나치당원이었고, 인종적 정화에 집착했으며, 오스트리아에서 1933년에 독일로 이주하기 이전부터 이미 열성적인 친위대 행동원이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범죄는 전체와 평범함으로 희석 시킬 수 없는 행위였다고 주장한다. 스탕네트 "악은 평범하지 않았다" 더불어 그가 법정에서 한 말들은 모두 그가 꾸며낸 거짓말이며 결국 그도 죄를 무마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다른 범죄자와 똑같은 인간이었다고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악의 평범성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는 매우 많다. 특히나 군 조직과 같이 상명하복의 위계질서가 강하게 자리 잡은 곳에서는 더욱 심하다. 가까운 역사에서는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국민들을 상대로 폭력을 휘두른 군인들의 사례가 있다. 악의 평범성과 관련하여 군 조직에서는 언제나 '상관의 불합리한 명령에 복종해야 할 것인가'와 같은 딜레마가 있다.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것은 군인의 도리가 아니지만 불합리한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악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학교, 직장 등 단체생활을 하는 곳에서의 따돌림과 괴롭힘의 문제에도 악의 평범성을 발견할 수 있다. 조직의 분위기가 특정인을 괴롭히고 따돌리는 방향으로 형성되면 구성원들은 기계적으로 해당 분위기에 맞는 행동들을 하게 되고, 결국 악행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도 조직 바깥에서는 악하지 않고 평범한 사람인 경우가 많다.
찰스 컬런은 29명 살인에 대한 유죄를 인정했다. 실제 피해자 수는 400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컬런은 끝내 살해 동기를 밝히지 않았다. 찰리 컬런은 현재 뉴저지 주립교도소에서 18번의 종신형을 살고 있으며, 가석방 신청은 2403년에나 가능하다. 컬런은 16년 동안 간호사로 일했는데 근무했던 병원 대부분이 컬런에게 의구심을 품었지만 그의 범행을 저지하거나 폭로한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병원들을 상대로 이뤄진 형사소송 절차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찰스는 관료조직의 일원으로서 행위한 것이 아니라 단독 범행이라는 점에서 아이히만의 경우와는 차이가 있다. 또 찰스의 행위가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고 평범하게 행하는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하지만 수많은 환자를 살해한 연쇄 살인범이라면 우리는 흔히 사악하고 악마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선입견을 갖지만 찰스는 전혀 그런 싸이코 패스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인정받고 사랑 받고 싶은 하나의 보통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는 가망없는 중환자를 살해 함으로써 그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었다는 사명의식으로 자신의 죄의식을 상쇄 시켰음이 분명하다. 즉 죄의식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찰스는 악의 평범성을 입증하는 인물이라고 보아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는 400명에 달하는 환자를 살해하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찰스 컬린의 이야기를 담담하고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진실을 밝히기를 거부하는 병원측의 태도에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었던 경찰들은 그저 속수 무책일 뿐이었다. 의외로 문제를 해결해 낸 것은 정의롭고 헌신적인 에이미의 컬린에 대한 진정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악의 평범성과 인정투쟁, 사랑으로서 상대를 인정해 주는 것의 소중함을 이 영화를 통해 확인해 보는 것도 보람찬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