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누군가는 사랑에 빠진다.
건대입구역 7시 50분
15분간의 설렘 - 1화: 7시 50분, 건대입구역 2번째 칸
"늦었다."
알람을 끈 지 10분이 지나서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김소영은 재빠르게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가방을 챙기고 현관문을 나서며 에어팟을 귀에 꽂았다.
♪ 난 알아요 당신이 떠나간 걸... ♪
이문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27살에게는 조금 올드한 취향이었지만, 소영에게는 이런 음악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었다.
건대입구역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7시 50분 지하철을 놓치면 회사에 지각이다.
지하철역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소영은 핸드폰을 확인했다. 7시 49분. 딱 맞다.
2호선 승강장, 2번째 칸 앞. 어김없는 자리였다. 소영은 이런 루틴을 좋아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음악.
전동차가 들어오고,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우르르 밀려나오는 사이로 소영도 재빠르게 들어섰다. 그런데—
"앗!"
누군가 그녀의 발등을 밟았다.
소영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을 때, 시간이 잠시 멈춘 것 같았다.
키 큰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이 또렷했고, 미안해하는 표정이 선명했다.
'...존잘이네.'
3년간 광고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며 수많은 모델들의 얼굴을 봐온 소영의 전문가적 시각이 자동으로 작동했다. 뚜렷한 이목구비, 적당히 각진 턱선, 깔끔한 헤어스타일.
"죄송합니다!"
남자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컸다. 유선 이어폰을 끼고 있던 그는 한쪽 이어폰을 빼며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말했다.
"정말 죄송해요!"
주변 사람들이 힐끔 쳐다볼 정도였다. 소영은 당황한 듯 손을 흔들었다.
"아, 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어폰을 완전히 빼고, 이번에는 적당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죄송해요. 음악을 좀... 크게 들었나 봐요."
그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낮고 따뜻했다. 소영은 어쩐지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전동차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남자는 창가 쪽으로 이동했다. 소영은 괜히 가방끈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가, 몇 초 후 슬쩍 그쪽을 다시 바라봤다.
한강대교를 건널 때쯤, 아침 햇살이 창문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 빛 속에서 남자의 옆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다시 유선 이어폰을 끼고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이 왠지 신비로워 보였다.
'왜 그렇게 크게 말했을까?'
소영은 속으로 궁금해했다. 음악을 크게 들어서 자기 목소리가 큰 줄 몰랐나?
'근데... 목소리 좋네.'
그날 밤, 원룸에 돌아온 소영은 침대에 벌러덩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아침에 그 사람...'
"죄송합니다!"
갑자기 그 남자의 큰 목소리가 떠올라 소영은 피식 웃었다.
"뭐야, 진짜 크게 말하던걸."
혼자 중얼거리다가, 소영은 벌떡 일어났다.
"잠깐, 나 뭐하고 있는 거야?"
거울을 보며 자신에게 말했다.
"김소영, 너 미쳤니? 모르는 사람 생각해서 뭐해?"
하지만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이 이상하게 밝아 보였다.
"아, 정말!"
소영은 베개로 얼굴을 덮었다. 하지만 베개 속에서도 그 남자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 나직하게 말했던 목소리.
죄송해요. 음악을 좀... 크게 들었나 봐요.
"에이, 그냥 우연이었는데 뭘..."
중얼거리면서도 소영은 벌떡 일어나 옷장 앞으로 갔다. 평소보다 10분 일찍 일어나서 옷도 좀 더 신경 써서 입어볼까?
"아니다, 뭘 괜히..."
하지만 결국 내일 입을 옷을 두 벌이나 꺼내놓고 고민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다음날부터 소영의 일상이 조금씩 바뀌었다. 매일 아침 7시 45분, 어제보다 5분 일찍 나서게 됐고, 립밤도 바르게 됐다.
'그냥... 나를 위한 거야.'
그리고 매일 아침, 2호선 2번째 칸에서 그 남자를 확인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 어제와 똑같은 자리에 서 있는 그를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둘은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같은 공간에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소영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한강대교를 건널 때마다 소영은 슬쩍 그 남자를 바라봤다. 유선 이어폰을 끼고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옆모습을.
매일 보다 보니 더 잘생긴 것 같았다. 집에 와서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얼굴을 종이에 슥슥 그려보기도 했다. 디자이너의 직업병일까.
"나 완전 미쳤나 봐."
하지만 그런 일상이 싫지 않았다.
회사에서도 소영의 변화를 눈치채는 사람이 있었다.
"소영아! 우리 소영이!"
마케팅팀 박과장님의 목소리가 사무실 전체에 울렸다. 소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네, 박과장님."
"어머, 우리 소영이 요즘 왜 이렇게 예뻐? 뭔가 다른데? 화장 바꿨어? 아니면 남자 생겼어?"
40대 초반의 박과장님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착하긴 하지만 정말, 정말 말이 많았다.
"아니에요, 그냥..."
"립밤도 바르고! 어머, 색깔도 이뻐. 그런데 말이야, 어제 그 광고안 클라이언트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진짜 별의별 소리를 다 하더라고..."
박과장님의 수다가 시작됐다. 주변 동료들이 힐끔힐끔 바라보는 게 보였다. 소영은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속으로는 '아, 박과장님... 너무 힘들어...'라고 생각했다.
그런 평화로운 일상이 며칠 더 계속됐다. 소영에게는 매일 아침 지하철에서 그 남자를 보는 것이 하루 중 가장 기대되는 시간이었다.
어느 날 아침, 소영은 평소처럼 건대입구역 2번째 칸에 올라탔다. 그 남자도 어김없이 제자리에 서 있었다.
에어팟을 끼고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를 들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한강대교에 들어서자 아침 햇살이 창문으로 스며들었다.
그런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강변역에서 문이 열렸다.
"어머, 소영아!"
익숙한 목소리에 소영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박과장님이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며 같은 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소영은 당황해서 에어팟을 빼며 일어났다.
"어머, 박과장님! 어떻게 여기에..."
"아, 나 이사했거든! 강변 쪽으로. 원래 잠실에 살았는데 월세가 너무 올라서 어쩔 수 없이 이사했어. 그런데 알고 보니까 출근이 더 편해졌네!"
박과장님이 환하게 웃으며 소영 옆으로 다가왔다.
"어머, 소영아 자리 있어? 나 서있기 힘든데..."
"아, 네... 여기 앉으세요."
소영은 자리를 조금 비켜주었다. 박과장님이 소영 바로 옆에 앉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소영아, 너 요즘 정말 이뻐졌다. 뭔가 달라. 혹시 정말 남자 생긴 거 아니야?"
소영은 괜히 얼굴이 빨개지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정말..."
"에이, 숨기지 마. 언니가 다 알아. 요즘 화장도 신경 쓰고, 옷도 예쁘게 입고. 분명히 누군가 있지?"
박과장님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주변 사람들이 슬슬 쳐다보기 시작했다.
"박과장님, 목소리가..."
"아, 미안미안. 근데 정말 궁금해. 어떤 사람이야? 나이는? 직업은? 어디서 만났어?"
소영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괜히 그 남자 쪽을 힐끔 봤는데, 다행히 그는 여전히 이어폰을 끼고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들었을까?'
"그런데 소영아, 나 진짜 궁금한 게 있어. 요즘 젊은 애들은 어떻게 만나? 소개팅? 아니면 앱?"
박과장님의 질문 공세가 계속됐다.
"소영이 같은 애는 연애를 안 해서 아까워. 이렇게 예쁜데 왜 혼자 다녀? 언니가 좋은 사람 소개해줄까?"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하지만 박과장님은 멈추지 않았다.
"우리 마케팅팀 김대리 어때? 키도 크고 성격도 좋던데. 아니면 영업팀에..."
소영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평소 조용히 음악 들으며 지내던 평화로운 지하철 시간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한강대교를 지날 때까지 박과장님의 수다는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말이야, 소영아. 연애할 때는 너무 쉽게 주면 안 돼. 남자들은 쉽게 얻은 건 소중히 안 여기거든. 언니 경험상..."
소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 정말...'
성수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리면서 지하철이 조금 여유로워졌다.
"어머, 자리 났네!"
박과장님이 빈 자리를 가리켰다. 소영 맞은편에 3자리가 비어있었다.
"소영아, 저기 가서 앉자!"
"아, 괜찮아요. 여기서..."
하지만 박과장님은 이미 일어서서 소영의 손을 잡아끌었다.
"뭘 괜찮아. 앉는 게 편하지."
어쩔 수 없이 소영은 박과장님을 따라 빈 자리로 이동했다. 박과장님이 가운데 자리에 앉고, 소영이 그 옆에 앉았다.
그런데 잠시 후, 한 아주머니가 박과장님 옆자리에 앉았다.
건대입구역에서부터 계속 서 있던 그 남자가 아주머니 앞에 서게 됐다.
소영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잠시 후, 아주머니가 뚝섬역에서 내렸다.
그 순간, 박과장님이 빈 자리로 이동하려고 했다.
"어머, 자리 났네. 소영아, 이쪽이 더 넓어..."
하지만 그때였다.
그 남자가 재빠르게 아주머니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버렸다.
소영과 남자 사이에는 박과장님이, 그리고 소영 바로 옆자리에는 그 남자가 앉게 된 것이었다.
소영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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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5센티미터의 거리
소영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바로 옆자리에 그 남자가 앉아있었다. 팔꿈치만 살짝 움직여도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진짜야? 이게 진짜야?'
소영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숨소리가 너무 큰 것 같아서 의식적으로 작게 쉬려고 했더니 오히려 더 어색해졌다.
박과장님은 여전히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소영아, 그런데 말이야. 요즘 젊은 애들은 소개팅할 때 뭘 중요하게 봐? 나이? 직업? 아니면 외모?"
'지금 이런 걸 물어보시면 어떻게 해요...'
소영은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숙였다. 혹시 옆에 있는 남자가 들을까 봐 걱정됐다.
그런데 그때였다.
남자가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 소영이 슬쩍 옆을 보니 남자가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그의 옆모습이 너무 가까이 보였다. 깔끔하게 정리된 머리카락, 오똑한 코, 집중할 때 살짝 내려오는 안경...
'와... 진짜 잘생겼다.'
그런데 그 순간, 남자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소영과 눈이 마주쳤다.
'어떡하지?!'
소영은 당황해서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심장소리가 너무 커서 들릴 것 같았다.
남자는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핸드폰을 보기 시작했다.
뚝섬역을 지나고, 성수역에 도착했다.
박과장님의 수다는 계속됐지만, 소영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온 신경이 옆에 앉은 남자에게 쏠려 있었다.
가끔 남자가 움직일 때마다 소영의 심장이 뛰었다. 그가 가방을 뒤적일 때, 핸드폰을 만질 때, 심지어 숨을 쉴 때마다.
'이런 적 처음이야...'
소영은 자신도 놀랐다. 이렇게 한 사람 때문에 이렇게 떨린 적이 없었다.
왕십리역을 지날 즈음, 남자가 이어폰을 다시 꽂았다. 유선 이어폰 선이 소영 쪽으로 살짝 흘러내렸다.
그런데 그때, 남자의 핸드폰 화면이 살짝 보였다.
'어?'
화면에 떠 있는 건 음악 앱이었는데...
'최신 걸그룹 댄스 모음'
소영은 눈을 의심했다. 겉보기에는 차분하고 깔끔해 보이는 남자가 걸그룹 음악을?
'혹시 잘못 본 건가?'
하지만 분명했다. 화면에는 아이브, 뉴진스, 에스파 등의 노래 제목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와... 반전이네.'
소영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왠지 그 남자가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선릉역이 가까워졌다.
남자가 일어날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가방을 정리하고, 이어폰을 빼기 시작했다.
'아, 벌써 끝나는구나...'
소영은 아쉬웠다. 이렇게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끝나간다니.
선릉역에 도착하자 남자가 일어섰다. 그런데 일어서면서 실수로 소영의 가방끈을 밟았다.
"앗, 죄송해요."
남자가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이번에는 첫날처럼 크지 않게.
"아, 괜찮아요."
소영도 작게 대답했다.
남자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내렸다.
소영은 창문 너머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내일도 볼 수 있을까?'
다음날 아침, 소영은 평소보다 30분이나 일찍 일어났다. 옷도 더 신경 써서 골랐고, 립밤도 새로 발랐다.
'오늘도 앉을 수 있을까?'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지하철에 올라탔다.
그런데 그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어? 오늘은 안 온 건가?'
소영은 실망스러웠다. 어제 그렇게 가까이 앉았었는데...
강변역에서 박과장님이 타면서 평소처럼 수다를 시작했지만, 소영은 집중할 수 없었다.
'혹시 어제 내가 뭔가 실수했나?'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런데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 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났다.
소영은 점점 우울해졌다.
'혹시 내가 너무 뻔뻔하게 쳐다봐서 불편했던 건 아닐까?'
자책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저녁,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일찍 퇴근했다.
'밤공기도 좋은데 바람이나 쐬다 집에 갈까?'
소영은 혼자 중얼거리며 선릉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냥 산책하는 거야. 운동도 해야 하는데 맨날 지하철만 타고... 가끔은 걸어야지.'
스스로에게 그럴듯한 핑계를 대며 선릉역 2번 출구까지 왔다.
'여기 카페도 많고... 저녁 먹을 곳도 찾아볼까?'
하지만 정작 카페는 보지도 않고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뭘 이렇게 두리번거리고 있지? 나 진짜 이상해졌네.'
30분 정도 서성거리다가 마침내 그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 순간, 소영의 세상이 무너졌다.
그 남자가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는 예쁜 여자를 부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몸을 기대며 뭔가 말하고 있었고, 남자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부축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는 다정한 연인처럼 보였다. 여자가 남자에게 바싹 붙어서 걸어가는 모습, 남자가 그런 여자를 자연스럽게 챙기는 모습.
'역시... 연인이 있었구나.'
소영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두 사람은 지하철 입구 쪽으로 사라져갔다.
소영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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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혼자만의 이별
그날 밤, 소영은 집에 돌아와서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며 계속 그 장면이 떠올랐다. 술에 취한 여자를 부축하던 그 남자의 모습. 자연스럽게 여자를 챙기던 모습.
'그래, 당연하지. 그런 사람이 혼자일 리가 없어.'
소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뭘 기대했던 거야?'
일어나서 책상으로 갔다. 며칠 전 그려둔 스케치들이 그대로 있었다. 지하철에서 본 그 남자의 옆모습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또렷한 눈, 창밖을 바라보는 옆모습, 이어폰을 끼고 있는 모습...
디자이너 특유의 관찰력으로 디테일하게 그려놓은 스케치들이었다.
"이런 걸 왜 그렸지?"
소영은 스케치북을 들어 올렸다가, 순간적으로 화가 났다.
찢어버리고 싶었다.
'27살이 뭐하는 거야? 지하철에서 본 모르는 남자 그려가면서?'
첫 장을 찢었다.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도.
"바보 같아, 정말."
꾸겨진 종이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 나이에 무슨 짝사랑이야?"
소영은 찢어진 종이들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제 그만하자. 내일부터는 그냥 평범하게 출근하고, 평범하게 살자.'
다음날 아침, 소영은 평소 시간에 일어났다. 평소 입던 옷을 입고, 립밤도 바르지 않았다.
지하철에서도 이어폰을 끼고 음악만 들었다. 그 남자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괜찮아, 이게 정상이야.'
스스로를 다독이며 하루를 보냈다.
저녁, 가족들과 함께하는 저녁 식사 자리.
"누나, 왜 이렇게 시무룩해?"
대학생인 동생 민우가 물었다.
"응? 나 안 시무룩한데?"
"아니, 완전 우울해 보이는데. 며칠 전에는 되게 밝더니."
어머니도 숟가락을 놓으며 소영을 바라봤다.
"소영아, 무슨 일 있어?"
"아니에요, 그냥 회사 일이 좀..."
"혹시 남자 때문이야?"
아버지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아빠!"
"뭐야, 남자 생겼어?" 동생이 눈을 반짝였다.
"아니라니까요!"
소영이 소리를 지르자 온 가족이 조용해졌다.
"...미안해요. 그냥 좀 피곤해서."
어머니가 걱정스럽게 소영의 등을 쓰다듬었다.
"소영아, 뭔가 힘든 일 있으면 얘기해. 알겠지?"
"네..."
하지만 소영은 말할 수 없었다. 지하철에서 본 모르는 남자를 좋아했다가 실연당했다고? 27살이?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는데, 동생이 뒤따라왔다.
"누나."
"왜?"
"진짜 남자 때문이지?"
"......"
"누나 표정 보면 다 알아.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가 뭔가 안 좋은 일 생긴 거지?"
소영은 깜짝 놀랐다. 동생이 언제 이렇게 눈치가 빨라졌지?
"민우야..."
"걍 고백하면 되는데 뭘 그렇게 고민해?"
"뭐?"
"좋아하면 고백하는 거지. 간단하잖아."
"그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아?"
"쉽지. 안 되면 말고."
동생의 단순한 대답에 소영은 할 말을 잃었다.
"근데 누나, 혹시 짝사랑이야?"
"......"
"아, 짝사랑이구나. 그럼 더 고백해야지. 아무것도 안 하면 평생 모르잖아."
"동생이 뭘 알아..."
"누나가 뭘 알아. 21살이 27살보다 연애 경험 많을 수도 있거든."
소영이 어이없어서 동생을 째려봤다.
"나가."
"걍 고백해, 진짜. 안 되면 말고."
동생은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며칠이 지났다.
소영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지하철에서는 자꾸 그 남자를 찾게 됐다.
'안 봐야지.'
하지만 시선이 자꾸 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가끔, 정말 가끔 그 남자가 보일 때가 있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두근거리지는 않았다.
'연인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소영은 평소처럼 퇴근해서 집에 와 있었다. 샤워를 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저녁을 먹으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박과장님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소영아! 급하게 클라이언트 미팅 자료 수정해야 할 것 같아! 미안한데 다시 나와줄 수 있어?"
소영은 한숨을 쉬었다. 집에 왔는데 다시 야근이라니.
"네, 알겠습니다."
"고마워! 야근 각오해야 할 것 같아. 미안해."
어쩔 수 없이 소영은 다시 외출 준비를 했다. 간단히 화장을 고치고 가방을 챙겼다.
선릉역으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와 역 밖으로 나서는데...
하늘에서 하얀 눈송이가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첫눈이었다.
그런데 저 앞에서 선릉역 쪽으로 걸어오는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그 남자였다.
혼자서 걸어오고 있었다.
'어? 혼자네?'
소영의 발걸음이 멈췄다.
눈송이가 그와 소영 사이로 흩날리고 있었다.
동생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걍 고백해, 진짜. 안 되면 말고."
'지금 아니면 영영 기회가 없을 수도 있어.'
소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용기를 내야 했다.
"저기..."
입술이 떨리며 작은 소리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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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Love Dive
한 달 전.
"늦었다!"
이준호(29세, IT 개발자)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재빠르게 움직였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도 시간을 확인했다.
7시 48분.
'2분 늦었네.'
준호는 유선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집을 나섰다. 평소보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건대입구역으로 향했다.
♪ DIVE INTO YOU ♪
IVE의 'Love Dive'가 귓가에 울렸다. 29살 개발자에게는 조금 어린 취향일 수 있지만, 준호는 이런 음악이 아침 기분을 좋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했다.
♪ 난 좀 독하지 everyday, 절대 지지 않지 ♪
리듬에 맞춰 자연스럽게 어깨가 움직였다. 주변에 사람이 별로 없어서 다행이었다.
건대입구역 계단을 내려가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7시 49분.
'괜찮네.'
2호선 승강장, 2번째 칸 앞. 준호도 매일 같은 자리에서 지하철을 탔다. 루틴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전동차가 들어왔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우르르 나오는 사이로 준호도 들어섰다.
그런데 그때였다.
실수로 앞에 서 있던 여자의 발을 밟아버렸다.
"앗!"
여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고, 준호도 놀라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큰 눈과 작은 얼굴. 자연스러운 웨이브의 머리카락. 그리고 무엇보다...
'귀엽다.'
IT 회사에서 3년간 일하며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자 동료들이었다. 이렇게 예쁜 사람을 가까이서 본 게 언제였을까.
"죄송합니다!"
음악 소리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 크기를 제대로 못 잡았다.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는 게 보였다.
'아, 너무 크게 말했나?'
당황해서 이어폰을 빼며 다시 말했다.
"정말 죄송해요!"
여자가 당황한 듯 손을 흔들었다.
"아, 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이번에는 이어폰을 완전히 빼고 적당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죄송해요. 음악을 좀... 크게 들었나 봐요."
여자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그리고 왠지 얼굴이 빨개지는 것 같았다.
'혹시 내가 너무 당황스럽게 했나?'
준호는 여자가 불편해할까 봐 창가 쪽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자꾸 그녀 쪽을 힐끔힐끔 보게 됐다.
한강대교를 건널 때쯤, 아침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왔다. 그 빛 속에서 여자의 옆모습이 더욱 예뻐 보였다.
'예쁘다, 진짜.'
준호는 평소 같으면 핸드폰을 보거나 창밖만 바라봤을 텐데, 자꾸 그녀를 의식하게 됐다.
그날 밤, 준호는 원룸에서 맥주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아침에 그 여자...'
발을 밟았을 때 올려다보던 그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왜 그렇게 크게 말했을까?"
혼자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준호, 너 진짜 바보 같았어."
하지만 그 여자의 "괜찮아요" 하던 목소리가 자꾸 생각났다.
"내일도 볼 수 있을까?"
준호는 맥주캔을 내려놓고 벌떡 일어났다.
"잠깐, 나 뭐하고 있는 거야?"
거울을 보며 자신에게 말했다.
"이준호, 너 미쳤니? 모르는 사람 생각해서 뭐해?"
하지만 거울 속 자신이 이상하게 웃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준호의 일상이 바뀌었다.
평소 7시 48분에 나서던 걸 7시 43분에 나서기 시작했다. 5분 일찍.
'그냥... 여유롭게 가는 거야.'
하지만 정작 지하철에서는 그 여자를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제와 똑같은 자리에 서 있는 그녀를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오늘도 왔구나.'
둘은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같은 공간에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준호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매일 아침 한강대교를 건널 때마다 준호는 슬쩍 그녀를 바라봤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을.
며칠이 지나자 더 예뻐 보였다. 집에 와서는 오늘 그녀가 입었던 옷이나 헤어스타일을 떠올리며 혼자 웃기도 했다.
"나 완전 이상해졌나 봐."
하지만 그런 일상이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강변역에서 평소보다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소영아!"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며 같은 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소영?'
준호의 귀가 번쩍했다.
"어머, 소영아 자리 있어? 나 서있기 힘든데..."
그 여자가 또 그 이름을 불렀다.
준호는 그 여자가 말을 거는 상대를 찾으려고 슬쩍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 여자였다. 자신이 매일 보던 그 여자가 대답하고 있었다.
"아, 네... 여기 앉으세요."
'소영... 그 여자 이름이 소영이구나.'
준호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성수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리면서 지하철이 조금 여유로워졌다.
"어머, 자리 났네!"
그 아줌마가 빈 자리를 가리켰다. 소영 맞은편에 3자리가 비어있었다.
"소영아, 저기 가서 앉자!"
어쩔 수 없이 소영은 아줌마를 따라 빈 자리로 이동했다. 아줌마가 가운데 자리에 앉고, 소영이 그 옆에 앉았다.
그런데 잠시 후, 한 아주머니가 아줌마 옆자리에 앉았다.
준호는 아주머니 앞에 서게 됐다.
'가까워졌네.'
그런데 뚝섬역에서 아주머니가 내렸다.
그 순간, 준호가 재빠르게 빈 자리에 앉았다.
소영과 준호 사이에는 수다쟁이 아줌마가, 그리고 소영 바로 옆자리에는 준호가 앉게 된 것이었다.
준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바로 옆자리에 소영이 앉아있었다. 팔꿈치만 살짝 움직여도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진짜야? 이게 진짜야?'
아줌마의 수다는 계속됐지만, 준호는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온 신경이 옆에 앉은 소영에게 쏠려 있었다.
가끔 소영이 움직일 때마다 준호의 심장이 뛰었다. 그녀가 가방을 뒤적일 때, 핸드폰을 만질 때, 심지어 숨을 쉴 때마다.
'이런 적 처음이야...'
준호는 자신도 놀랐다. 이렇게 한 사람 때문에 이렇게 떨린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팀장이 준호를 불렀다.
"준호야, 신규 프로젝트 배정됐어."
"아, 네."
"클라이언트가 급해서 한 달 반 정도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할 것 같아. 7시 30분까지 와야 해."
준호의 얼굴이 굳었다.
"7시 30분이요?"
"응. 미안한데 부탁해. 다른 애들은 다 프로젝트가 있어서."
7시 30분까지 회사에 도착하려면 최소 6시 50분에는 집에서 나서야 했다.
그러면 소영과 다른 시간대 지하철을 타게 된다.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음날부터 준호는 새로운 시간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6시 50분에 나서는 아침은 막막했다. 평소 같으면 소영을 보는 즐거움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냥 출근이었다.
'보고 싶다.'
일주일이 지나자 확실해졌다.
'나 소영 좋아하는 거 맞네.'
한 달 반 동안 소영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아플 줄 몰랐다.
회사에서도 집중이 안 됐다. 프로젝트에 몰두하려고 해도 자꾸 그녀 생각이 났다.
'지금쯤 지하철 타고 있을까?'
시계를 보며 생각했다. 7시 50분.
'한강대교 지나가고 있겠네.'
한 달 반이 지났다.
드디어 프로젝트가 끝나고 원래 시간에 출근할 수 있게 됐다.
준호는 기대에 부풀어 7시 43분에 집을 나섰다.
'오늘 소영 볼 수 있겠지?'
설레는 마음으로 건대입구역 2번째 칸에 올라탔다.
하지만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어? 왜 없지?'
혹시 늦었나 싶어서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확인했지만 소영은 나타나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났다.
'혹시 이사했나? 아니면 직장을 옮겼나?'
준호는 절망했다.
한 달 반 동안 그녀를 그리워했는데, 이제 영영 볼 수 없게 된 건가?
'아, 그때 연락처라도 물어볼 걸...'
하지만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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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그리운 것은 그리운대로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났다.
준호는 여전히 매일 아침 7시 43분에 나서서 2번째 칸에 올라탔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진짜 끝인가 보다.'
집에 돌아온 준호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소영..."
작게 중얼거려봤다.
한 달 반 전, 그녀와 바로 옆에 앉았던 날이 떠올랐다. 강변역에서 탄 수다쟁이 아줌마가 "소영아!"라고 부르던 순간.
그때 알게 된 이름이었다.
"김소영? 박소영? 이소영?"
여러 성을 붙여가며 불러봤다. 어떤 성이 어울릴까.
"소영아."
그 아줌마가 불렀던 것처럼 친근하게 불러봤다.
'예쁜 이름이네.'
준호는 핸드폰 메모장을 열어서 '소영'이라고 적어봤다. 그리고 지웠다가 다시 적었다.
"이준호, 너 진짜 이상해졌다."
하지만 그 이름을 계속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왠지 기분이 좋았다.
다음날 회사에서.
"준호야!"
후임 김주임이 다가왔다. 20대 후반의 김주임은 준호보다 1년 늦게 입사했지만, 워낙 일을 잘해서 빠르게 주임으로 진급한 인재였다.
"네, 김주임."
"선배님 요즘 이상해요. 뭔가 다른데?"
"어? 저 괜찮은데요."
"아니에요, 분명히 뭔가 있어요. 혹시 여자친구 생겼어요?"
김주임의 예리한 질문에 준호는 당황했다.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고..."
"에이, 숨기지 마세요. 얼굴에 다 써있어요."
주변 동료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준호 여자친구 생겼대!"
"진짜? 어떤 사람이야?"
준호는 손을 흔들며 부인했다.
"아니라니까요! 정말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동료들은 믿지 않았다.
특히 김주임은 확신에 찬 표정이었다. 예쁘고 똑똑한 김주임이었지만, 준호는 그냥 후임으로만 생각했다.
"선배님, 제가 다 알아요. 분명히 누군가 있죠?"
"김주임, 정말 아무것도 없어."
김주임은 준호에게 관심을 보였지만, 준호의 마음은 온통 소영에게만 향해 있었다.
며칠이 더 지났다.
준호는 점점 체념하기 시작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지하철을 타도 소영은 나타나지 않았다.
'정말 다시 볼 수 없는 건가?'
어느 날 아침, 준호는 평소와 다른 선택을 했다.
평소 듣던 걸그룹 음악 대신 다른 노래를 골랐다.
♪ 지나간 일들이 가슴에 사무쳐
그리워도 다시 볼 수는 없으니
이제는 안녕 내 옛사랑이여
행복하게 살아가오 ♪
이문세의 '옛사랑'이었다.
왠지 지금 기분과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래, 이제 정말 포기하자.'
준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소영은... 그냥 추억으로 남겨두자.'
그러던 어느 날, 팀 회식이 있었다.
신규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끝난 기념이었다.
"준호야! 우리 준호 덕분에 프로젝트가 잘 끝났어!"
팀장이 준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니에요, 다들 고생하셨죠."
회식이 진행되면서 김주임이 점점 취해갔다. 평소보다 말도 많아지고, 준호 옆에 바짝 붙어 앉기 시작했다.
"선배님, 진짜 고생 많으셨어요!"
"김주임도 수고했어."
"선배님이 있어서 회사 다니는 재미가 있어요!"
김주임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준호에게 자꾸 기댔다.
준호는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후임이 고생했으니까 이해하려고 했다.
"선배님은 정말... 완벽해요!"
"김주임,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아니에요! 저 아직 괜찮아요!"
하지만 김주임의 말이 점점 어눌해지고 있었다.
회식이 끝나고 모두 해산할 때, 김주임이 심하게 비틀거렸다.
"어우, 어지러워..."
"괜찮아?"
준호가 어쩔 수 없이 김주임을 부축했다.
"선배님... 고마워요..."
김주임이 준호에게 몸을 맡기며 걸었다.
준호는 김주임을 택시에 태워 보냈다.
'후임 챙기는 것도 선배 역할이지.'
준호는 별생각 없이 집으로 향했다.
그 다음 주, 회사에서는 아무도 특별히 김주임과 준호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
김주임도 평소처럼 일했고, 준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준호의 마음은 평소 같지 않았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지하철을 타지만 소영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 달이 더 지났다.
'이제 정말 포기해야 하나?'
준호는 점점 체념하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이문세의 '옛사랑'을 들으며 출근했다. 걸그룹 음악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지
지나온 일들이 가슴에 사무쳐 ♪
가사가 마음에 와 닿았다.
'나도 남들 모르게 그리워하고 있구나.'
준호는 이문세의 애절한 목소리에 자신의 마음을 맡겼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계속 그 노래만 들었다.
'소영... 잘 지내고 있을까?'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리워할 뿐이었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대로 두고 살아야지.'
준호는 스스로를 달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생각하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준호는 퇴근 후 선릉역으로 향하는 길을 걷고 있었다.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가기 위해. 이어폰에서는 이문세의 애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지나간 일들이 가슴에 사무쳐 ♪
걸어가던 중, 하늘에서 하얀 눈송이가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올해 첫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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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첫눈
준호는 퇴근 후 선릉역으로 향하는 길을 걷고 있었다.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가기 위해. 이어폰에서는 이문세의 애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지나간 일들이 가슴에 사무쳐 ♪
걸어가던 중, 하늘에서 하얀 눈송이가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올해 첫눈이었다.
준호는 이어폰을 빼고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봤다. 가로등 불빛에 반짝이는 눈송이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첫눈이네.'
준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봤다. 차가운 공기가 폐 속 깊숙이 들어왔다.
'소영이라면... 첫눈을 좋아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모습을 상상해봤다. 눈송이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모습을. 첫눈에 신나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준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선릉역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런데 저 앞, 선릉역 입구 근처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준호의 발걸음이 멈췄다.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소영이었다.
그녀는 역에서 나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송이가 그녀의 어깨 위로 하얀 점들을 찍어놓고 있었다.
'정말... 소영이야.'
준호는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착각이 아니었다.
두 달 동안 그리워했던 그 얼굴이 거기 있었다.
준호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왜 여기에... 이 시간에?'
소영도 준호를 발견한 듯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두 사람 사이로 눈송이가 끝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준호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정말 소영이 맞나?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야?'
준호의 마음속에서 희망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소영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준호도 한 걸음 다가갔다.
점점 가까워지는 거리. 하지만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준호는 두려웠다. 혹시 소영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혹시 자신을 불편해한다면?
하지만 동시에 기뻤다.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준호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번에는... 놓치고 싶지 않아.'
두 달 동안 후회했었다. 그때 용기를 내서 말을 걸었더라면.
이번에는 달라야 했다.
용기를 내야 했다.
소영도 무언가 결심하는 것 같았다. 작은 주먹을 쥐고 있었다.
그녀도 용기를 내려는 것 같았다.
준호는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이야. 지금 아니면 정말 영영 기회가 없을 수도 있어.'
이문세의 '옛사랑'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을까?
준호와 소영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저기요!"
"저기요!"
두 목소리가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며 동시에 울렸다.
준호는 깜짝 놀랐다. 소영도 똑같이 자신을 부른 것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소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오랜만이에요."
준호가 먼저 말했다.
"네?"
소영이 놀란 듯 반문했다.
'아, 이 남자도 날 아는구나?'
"네... 오랜만이에요."
소영이 수줍게 대답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소영이 다시 용기를 냈다.
"저기... 혹시 저랑 커피 한 잔 하실래요?"
준호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소영씨."
첫눈이 두 사람을 감싸며 하얗게 내리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에 반짝이는 눈송이들이 마치 축복하는 것 같았다.
눈 내리는 도시의 밤, 두 사람의 겨울이 시작되었다.
[완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