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은둔자의 인생 정산서
힘겹게 심은 씨앗은 소리 없이 꽃을 피운다. 오랜만에 멀리 떠나는 가족여행이 많은 생각을 불러냈다. 작년에 응모했던 문학공모전에서 비행기 티켓과 여행경비를 보냈다. 아내와 나는 원주공항에서 비행기를 탔고, 딸들은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탔다. 추운 겨울 날씨였다. 따듯한 제주도에서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것은 행복했다. 가족여행은 발버둥 치는 현실을 벗어나, 뜨겁게 호흡하는 맥박과도 같았다.
가족이라는 이름 앞에서 감사하던 마음의 진동이었다. 2024년 여름, 나는 거의 빈손이었다. 작가 생활을 함께 경영했던 학원사업은 코로나 19를 겪으며 파탄을 맞았다. 통장에 찍힌 예금 숫자는 형편없이 메말라갔다. 지난 몇 년간의 결실은 거의 제로 상태였다. 앞뒤를 맞추어봐도, 전혀 손익계산이 맞지 않았다. 현실은 너무 초라한 정산표를 껴안고 있었다.
아내와 함께, 항공기 기내의 끝자리 창가에 앉았다. 유리창을 두드리는 햇살의 온기 속에, 과거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2018년 2월, 연구원을 그만둘 때였다. 작가의 길을 걷고 싶었다. 하지만 퇴사 후, 곧바로 선거판으로 들어갔다. 한동안 언론을 상대로 보도자료를 배포하는 일을 맡았다. 거의 매일 글을 써야만 했다. 하지만 선거판의 점수는 너무 초라했다.
나는 다시 본연의 작가 생활로 돌아왔지만, 세상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사람처럼 허탈감에 빠져 있었다. 몰입된 삶 속에서 얻은 것은 덩그렇게 남아 있는 앙상한 삶의 뼈대였다. 푸른 잎을 다 떨군 채, 제 살을 파먹으며 버틴 옹이투성이 나무였다.
그때는 잘 몰랐다. 인생은 점수판의 숫자가 아니라는 걸.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손에 박힌 굳은살과도 같은 것이었다. 무소득의 시간은 나를 겸손하게 만들었다. 실패라고 생각한 자리는 나를 정직하게 만들었다. 기다림의 시간은 나를 기도하게 만들었다. 사실 눈에 보이지만 않았을 뿐, 나는 작가로서 다른 보상을 받고 있었다.
물론 아직 계산서가 나오진 않았어도 밤샘 작업, 몸의 무리, 참아냄을 내가 가야만 할 삶의 여정이라고 여겼다. 몸과 마음의 고단함은 나중에 갚아도 되는 것처럼, 늘 괜찮다는 말로 다독거리며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몸에서 이상징후가 발견되었다. 고혈압과 고지혈, 당뇨가 겹쳤으며, 너무 스트레스를 받은 탓인지 구안와사까지 발병했다. 한동안 병원 신세를 졌고 물리치료를 받았지만, 여전히 인생은 선불제라고 믿으며 살고 있었다. 물론 가족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성공한 뒤에 모든 것을 보상하면 된다는 생각, 그들의 삶을 선불로 사용해도 좋다고 여겼다. 미리 선불로 쓰고 미래에 갚으면 된다는 식의 인생관을 품고 있었다. 왜 성공을 위해서는 선불로 먼저 사용해도 된다고 느꼈던 것일까. 선불로 사용한 대가는 곧바로 계산서로 배달되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앞뒤 계산이 맞지 않는 시기가 있다. 오랜 시간과 투입한 노동력에 비해 다시 내게로 환산되지 않는 시간, 거의 성과가 없는 잔인한 기다림의 기간이었다. 실패는 그 이유라도 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기다려야만 하는 시간은 자기 삶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 속에 갇혀 있으면, 그동안 열심히 살았다는 것도 거의 설득력을 잃어버렸다.
위로가 안 되는 침묵이 흐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은 투자한 만큼 눈앞의 보상이 없으면, 쉽게 삶의 방향을 틀어버렸다. 그건 틀린 선택이 아니었다. 꿋꿋하게 삶을 지키기 위한 매우 현실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무감각했다. 돈이 되지 않아도, 박수가 없어도 힘겨운 길을 끝끝내 붙잡고 서 있었다. 이들은 이미 삶은 선불제보다 후불제라는 것을 간파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젊어서, 삶 자체를 무척이나 후회했던 적이 있었다.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방 국립대를 입학했을 때였다. 일찍이 객지로 공부하러 떠난 친구들은 서울 사대문 안의 유명한 대학으로 진학했는데, 시골에서 독학하듯이 공부했던 나는 지방 국립대를 들어갔다. 이유 없이 몰려오던 내 삶의 초라함을 온몸으로 맞이했다. 실패한 인생이라는 서툰 생각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선불제로서 그 삶이 결정되었음을 비관했다.
그리고 그때, 나를 괴롭혔던 질문은 ‘왜(why)’라는 줄기찬 물음이었다. 왜 나는 가난한 삶을 살아야만 했는지, 왜 나는 좋은 학교로 진학할 수 없었는지, 왜 나는 사회적 기회 앞에서 불평등을 느껴야만 했는지. 종잡을 수 없는 거친 질문들을 마음에 품고 살았다. 긴 방황의 터널에 빠져 헤어나오질 못했다. 꽤 긴 시간이 흘러가고 나서야, 다시 인생은 후불제라는 믿음을 되찾았다.
후불제 인생, 포기하지 않는 한 인생은 부도나지 않는다. 원주에서 이륙한 제주행 비행기는 백두대간을 옆에 끼고 남쪽으로 기수를 향했다. 적나라하게 펼쳐진 겨울 풍경, 거대한 산맥들이 잔가지를 치듯이 뻗어내린 산줄기들이 장관을 이루었다. 나는 한참 동안 겨울 풍경 속의 산줄기들을 감상하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어 아내와 대화를 나누었다.
“백두대간에서 뻗어나온 산줄기들이 인생을 닮은 것 같지 않아?”
아내는 호기심 어린 동그란 눈을 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내 입술에서 툭 튀어나온 말이 이상했는지, 그렇게 떠들고 있는 내 생각을 더 알고 싶은 눈치였다.
“아니, 인생은 백두대간처럼 크고 웅장한데, 우리가 사는 삶의 형태는 균형적이지 못하고 올라갔다가 내려왔다가, 다시 끊어졌다가 이어지는 산줄기와 같이 굴곡들이 많아 보여서...”
아내는 빙그레 웃을 뿐, 무응답의 눈빛을 보냈다. 마치 세상을 달관한 사람처럼, 소곤소곤 떠드는 내 모습이 신기한 듯이 바라보았다. 이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주행 비행기는 남해안의 바닷가를 날고 있었다. 화물선과 같이 커다란 배 한 척이 넓은 바다 위를 항해하고 있었다. 홀로 바닷길을 항해하는 화물선들도 외로워 보였다. 잔잔한 바닷가를 만나면 유유히 흘러가다가도, 거센 폭풍을 만나면 거칠게 배를 몰아야만 하는 것도 배들의 항해였다.
이런 삶의 줄기들은 멀리서 보면 장관을 이루는 게 분명했다. 현실에선 눈앞의 굴곡을 뚫고 가야 하지만, 멀리서 보면 목적지를 향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뱃길을 닮았다. 우선은 어떻게 가야 하는가보다, 어디로 갈 것인가가 중요한 것처럼 다가왔다. 우리가 제주도 가족여행을 가는 것처럼, 아내와 나는 원주에서 비행기를 탔고 딸들은 김포에서 비행기를 탔다. 어떤 항공수단을 이용해서 이동하느냐도 중요했지만, 그것보다 어디로 가느냐가 먼저였다. 그래야 다양한 항공수단을 알아보고 갈 곳을 찾아가는 이동노선과도 닮아 보였다.
나는 남해안 바다를 건너가는 동안, 또 하나의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에야 그때의 마음이 삶의 밑거름이 되었지만, 한동안 갈등에 휩싸였던 적이 있었다. 내가 작가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어떤 글을 쓸 것이냐를 놓고 망설였던 시절이 있었다. 시를 써서 문학가로서 온전히 활동할 것인가, 아니면 수필을 써서 작가의 삶을 살 것이냐의 선택이었다.
그 이유는 시를 써서 전국문예지 통과할 수 있었고, 수필을 써서 신인 작가로서 활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를 병행한 시인의 삶도, 작가의 삶도 작품의 완성도를 높게 끌고 가기에는 한계를 느껴야만 했다. 약 지금부터 15년쯤 전이었다. 문학단체에서 시와 수필 부문의 신인문학상을 받은 후, 우연히 서울에서 길거리를 걷다가 미래의 내 삶을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시를 쓸까, 아니면 수필을 쓸까.”
나는 국문학을 제대로 전공한 사람도 아니었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이런 글도 읽고 저런 글도 쓰다 보니 여기까지 왔을 뿐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늘 입에 달고 사는 것은 생활문학이라는 장르였다.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중간쯤에 놓인 생활문학, 연구자로서 세상을 이해했던 삶의 구조와 홀로 독학했던 문학적인 정서를 합친 융합적인 장르를 생활문학이라고 강조했다.
문학성과 지성의 중간쯤에 놓인 장르라고 말하고 싶었다. 결국 내가 선택한 주 종목은 생활수필이었다. 사람들에게 공감이 되고 버팀목이 되는 생활 장르 속의 수필을 선택했다. 그 수필이라는 것도 문학성과 감성의 극치를 달리는 것보다는, 생활 속에서 가볍게 길어 올린 것을 작가의 시선에서 따듯한 말로 곱게 포장해서 선보이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생활수필을 택한 것은 어쩌면 나의 체질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거창한 문학 이론보다, 시장 골목의 국밥 냄새와 저녁 버스 안의 피로한 표정들이 더 먼저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사람들 곁에 서 있는 문장을 쓰고 싶었다. 박수 받는 문장보다, 고개 끄덕이게 하는 문장을 남기고 싶었다.
비행기는 구름을 뚫고 남쪽으로 더 멀리 날아갔다. 창밖의 풍경은 한라산 백록담의 흰 겨울빛을 보여주었다. 바다 건너 제주도의 한라산에도 겨울은 눈부신 풍경을 빚어내고 있었다. 그 위로 쏟아지는 햇빛은 묘하게 따듯했다. 나는 그 빛을 보며, 인생은 능선이 아니라 그 위를 비추는 빛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품었다.
돌아보면 나는 늘 어긋나게 계산해왔다. 시간을 투자하면 결과가 나올 줄 알았고, 노력하면 반드시 높은 숫자가 따라올 줄 알았다. 그러나 인생은 숫자로 정리되지 않았다. 나의 보상은 통장으로 오지 않고, 사람으로 왔다. 명함으로 오지 않고, 관계로 왔다. 성과표 대신 굳은살로 남았다.
어쩌면 후불제 인생이란, 나중에 보상받는 구조가 아니라 지금을 함부로 쓰지 않는 태도인지도 모른다. 오늘의 한 문장, 오늘의 한 숨, 오늘의 한 끼를 소중히 쓰는 사람만이 끝내 웃을 수 있는 허락된 삶의 구조. 나는 그 단순한 사실을 너무 늦게 배운 것만 같았다.
푸른 바다와 붙어 있는 제주국제공항이 시야에 들어왔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수평선 위로 작은 건물들이 점처럼 흩어져 있었다. 그곳에도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방향으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누구는 빠르고, 누구는 느렸어도 오늘을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또다른 깨달음을 얻었다. 후불제 인생이란, 나중에 받을 배당금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결핍마저 ‘자산’으로 기록하는 태도였다. 정산의 날을 기다리기보다, 항해를 멈추지 않는 태도라는 것을. 아내가 내 손을 가만히 잡았다. 말없이 건네는 가족의 온기 속에서, 이미 많은 것을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통장은 비어 있던 날이 많았지만, 완전히 빈 인생은 아니었다. 넘어졌던 자리마다 나를 붙잡아 준 손들이 있었고, 실패의 그림자마다 배움이 따라왔다.
비행기가 착륙을 준비하며 서서히 고도를 낮추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는 조급해하지 말자.
결과보다 방향을 보자.
속도보다 마음을 지키자.
후불제 인생은 언젠가 크게 보상받는 구조가 아니다. 끝까지 자기 길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게, 조용히 쌓여가는 깨달음의 구조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삶의 자취는 사라지지 않는다. 늦게 와도, 틀리지 않는다. 창밖으로 제주국제공항의 활주로가 가까워졌다. 나는 이상하게도 확신이 들었다. 아직 내 인생의 계산은 끝나지 않았고, 여전히 행복한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인생은 아직도 정산 중이었다.
활주로 위로 내려앉는 것은 비행기가 아니라, 오래 버틴 내 삶이었다.
#기안장 작가의 또 다른 브런치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