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은둔자의 수선법
마음에는 진실의 빗장이 걸려 있다. 살다 보면, 가끔 어설픈 감정 신호가 잡힌다. 그중에는 마음이 진동하고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는 감정이 있다. 부끄러움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들키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였을 때, 마음과 얼굴에는 동시에 붉은 꽃이 피어오른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점차 사라진다. 진실을 말해야 할 때 침묵하거나, 침묵해야 할 때 혀를 놀린 자가 겪는 영혼의 열병이다.
나는 공원 벤치의 구석진 곳에서 곤충의 허물을 보았다. 애벌레에서 갓 태어난 듯한 매미의 껍질이었다. 가장 연약한 시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구석진 곳으로 스며들었다. 연약한 성장의 시기를 보호하려는 자연스러운 엄폐막은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이었다. 몸집이 큰 새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도 있겠지만, 허물을 벗는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자연스러운 행동처럼 여겨졌다.
매미가 그 딱딱한 껍질을 남기고 떠난 것은 ‘부끄러움’을 벗어던진 것이 아니라, 더 뜨겁게 울기 위해 자신의 한 시절을 정성껏 개어두고 간 것이었다.
잠시였지만, 서글픈 내 기억이 떠올랐다. 지난 8년 간, 내 허물을 벗으려고 매일 누군가의 눈을 피해 도서관의 구석진 자리를 찾아갔다. 직장을 내려놓고 학원사업에 실패한 후, 부끄러움을 피해 찾아갈 수 있는 곳이었다. 견고했던 사회적 직함이 사라진 자리에는 ‘실패’라는 낙인이 흉터처럼 남았고, 나는 그 흉터를 가리기 위해 도서관의 외진 구석으로 숨어 들었다.
사람들과 크게 부딪치지 않으면서, 홀로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곳이었다. 도서관의 정적은 날카로운 면도날 같아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덧난 마음의 상처를 다시 베이는 기분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습관적으로 남청색 스웨터의 소매자락을 끌어당겨 손등을 덮었다. 스스로 구석진 자리로 밀어 넣던 유폐의 기간이었다.
긴 세월 동안, 나를 지켜준 유일한 방공호이자 보호막은 낡은 스웨터였다. 작은딸이 생일선물로 사준 스웨터를 8년 가까이 도서관에서 입었다. 반질반질했던 옷감은 보푸라기가 일어나고, 세련되었던 자태는 남루할 만큼 거칠게 탈색되었다. 사람들은 그 옷을 무명(無名)의 남루함이라 부르겠지만, 내겐 삶의 끝자락에서 자존감을 함께 지켜온 염치의 무게였다. 허물어진 자존감을 지켜냈던 마음의 진실이었다.
딸 아이의 응원이 깃든 그 옷감 사이에는 8년 치의 서늘한 도서관의 공기와 내가 삼킨 뜨거운 커피의 증기가 겹겹이 스며 있었다.
세상은 뻔뻔함이 곧 능력인 양 거침없이 민낯을 드러내며 유혹하기도 했다. 내가 약 25년 전에 받았던 박사라는 직함도, 연구직이라는 전문직종에서 일했던 것도, 가장이라는 책임감도 모두 내려놓은 채, 나의 성전(聖殿)은 도서관의 외진 구석진 자리였다. 그곳에서 내가 잃지 않았던 고결한 감정은 현재의 실패를 극복해야만 할 염치였다.
염치는 영혼의 방부제였다. 진실된 삶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려는 고결한 마음의 저항이었다. 어느 무더운 여름이었다. 도서관 벤치에서 잠시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도서관의 구석진 자리로 돌아올 때였다. 옆자리에 앉아 시험공부에 열중하던 젊은 친구의 등허리 춤으로 불쑥 삐져나온 붉은 속옷을 보았다. 허리띠와 짧은 티셔츠 사이로 감추고 싶은 부끄러움이 튀어나온 듯했다.
나는 피식 웃음을 머금고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하지만 과거의 사건 하나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한동안 서울에서 기러기 아빠로 살았었다. 아내와 딸들은 필리핀 산페르난도에서 조기유학을 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분기별로 한 번씩 맞교대하듯이, 각자의 삶의 터전으로 찾아갔다. 한 번은 내가 필리핀으로, 한 번은 가족들이 한국을 오고 갔다.
나는 인천국제공항에서 밤 비행기를 타고 클락공항으로 날아갔다. 클락공항에 도착한 후, 세관을 빠져나올 때였다. 필리핀의 출입국 사무소는 번잡한 외국인의 신분 확인보다, 수화물을 샅샅이 뒤지며 불편한 행동을 보이곤 했다. 가난한 국가라서 그런지, 가끔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날은 가볍게 세관을 통과하는 것 같았는데, 마지막 검열대에서 내 여행용 가방을 열고 이것저것 검사했다. 그리고 투박하게 생긴 필리핀 세관원은 하얀 비닐봉지에 곱게 싸놓았던 내 속옷을 보며 무엇이냐고 물었다.
갑작스런 질문에 언더웨어(underwear), 속옷이라는 말이 생각나질 않았다. 내 입술에서 튀어나온 말은 샤이 클로쓰(shy cloth), 부끄러운 옷이라는 성급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내 대답이 웃겼는지, 필리핀 세관원은 피식 웃으며 실소를 보였다. 나는 주변에 있던 여행객들 사이에서 불편한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그렇게 출입국관리소를 빠져나오며, 그 순간의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할 한국말로 욕설을 내뱉으며 세관원을 비웃었다. 나는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선택한 무기는 파렴치였다.
또 한 번의 기억은 최근의 일이었다. 설 명절을 보내기 위해 삼형제 가족들이 모두 모였다. 아이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려고 혁신도시의 메가박스를 찾았다. “왕과 사는 남자”라는 영화가 한창 유행하고 있었고, 가족들이 관람할 수 있는 가족영화였다. 우리 가족들은 영화 관람을 위해 두 번째 줄과 세 번째 줄에 앉았다. 영화를 보기 전에, 한참 동안 화장품 광고가 흘러나왔다.
나는 영화관의 두 번째 줄에 앉아 있었다. 내 바로 뒷자리에는 어린 조카가 앉아 있었다. 잠시 광고시간 동안에, 내가 써놓았던 글의 반응도 확인할 겸 핸드폰을 열고 페이스북으로 들어갔다. 그때 중국계 해외 쇼핑몰 회사의 속옷 광고가 떠올랐다. 겨우 부끄러운 곳만을 가린 붉은색 속옷을 입고 있던 19세 이상 등급의 광고였다. 나는 뒷자리에 앉아 있던 조카가 보았을까 봐, 갑자기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평상시 조카들에게 비춰졌을 겉모습과는 달리 페이스북에서 파렴치하게 야한 것을 골라보는 큰 아빠, 상상만 해도 끔찍할 만큼 아찔한 순간이었다.
페이스북의 알고리즘은 내 취향을 잘못 알았거나, 내 무의식의 파렴치를 꿰뚫어 보았을지도 모른다. 예상치 못했던 그 순간의 아찔함은 도서관의 낡은 스웨터로도 가릴 수 없는 생생한 민낯이었다.
나는 두 가지의 사건을 생각하며 염치와 파렴치를 되새겨보았다. 부끄러운 감정을 불러오는 것은 염치와 파렴치였다. 주로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감정 신호였다. 누군가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파렴치한 행동은 영혼의 피부에 박힌 딱딱한 굳은살이었다. 처음 가볍게 다가온 부끄러움을 외면할 때마다 굳은살이 두꺼워지는 것처럼, 결국 어떤 마음의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도 같았다. 파렴치한 자는 발가벗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가려야만 할 속살이 말라버렸기 때문이다.
반면에 염치는 영혼이 입고 있는 최소한의 속옷이라는 생각이었다. 타인에게 보이기 민망한 자신의 내면을 스스로 가릴 줄 아는 자발적인 수치심이었다. 그것은 화려한 외출복처럼 나를 뽐내게 하지 않지만, 내가 짐승이나 괴물이 되지 않도록 지켜주는 마지막 품격의 경계선이었다. 옷이 몸의 치부를 가리듯이, 염치는 사람이 지녀야 할 마땅한 도리가 내면의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사람들은 염치라는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 던졌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붉은 얼굴보다 더 두꺼운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서인지 염치는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낮은 곳의 마음이고, 파렴치는 그 마음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엔트로피(entropy)처럼 다가왔다. 그러나 나는 그 부끄러운 천을 한 겹 더 껴입기로 했다. 그것이 나를 파렴치한 세상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의 품위였다. 오랫동안 도서관의 외진 자리에서 입었던, 부끄러움의 올들이 짜인 그 낡은 옷을 이제야 정성껏 개어둔다. 삶의 가림막으로서 나를 지켜낸 것들이기에, 이제 세상이라는 광장으로 당당하게 걸어갈 준비를 하게 되었다.
나는 오랫동안 부끄러움을 약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들켜서는 안 될 마음의 흔들림이라 여겼다. 하지만 감각이 죽은 자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부끄러움은 아직 내 영혼이 살아있다는 가장 뜨거운 생존 신호였다. 내가 도서관의 외진 자리에서 보낸 8년의 세월은 실패의 흔적이 아니라, 염치를 껴안고 있던 진심의 흔적이었다.
붉게 물든 얼굴 뒤에는 언제나 진심이 깔려 있다. 나는 부끄러움을 벗어내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완벽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워할 줄 알아서 인간이었다.
_기안장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