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20. 고생을 저축했지만, 행복은 없었다

I후불제 인생I

by 작가 기안장


나는 고생을 저축이라 믿었다. 오늘의 땀을 미래의 통장에 이체하며 살았다. 수익률은 몰랐지만, 납부는 성실했다. 지금 땀을 흘린 시간은 언젠가 웃음으로 환전될 거라며 확신했다. 그래서 힘든 날에도 마음을 다독거렸다.


“이건 미래의 행복을 위해, 미리 내는 선불금이야.”


그렇게 말하면 고단한 하루를 견딜 만했다. 잠을 줄였고, 몸을 혹사했고, 마음까지 접어 두었다. 나는 성실한 납부자였지만, 수익률은 알 수 없었다. 거의 매번 선불금은 꼬박꼬박 납부했다. 남들보다 늦게 자고, 먼저 일어나며, 쉬는 날에도 마음을 그냥 쉬게 두지 않았다. 지금 아낌없이 내 삶을 위해 투자하면, 미래가 풍족해질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종종 주변 사람들은“그렇게까지 밤낮없이 할 필요가 있느냐”고.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고생해야 나중에 덜 힘들겠죠.”


누군가 내 삶을 걱정하면, 나는 늘 같은 대답을 꺼내 놓았다. 스스로 고생하지 않으면 불안했고, 편안하면 죄책감이 몰려왔다. 쉼은 사치였고, 즐거움은 미래의 보상을 앞당겨 쓰는 선입금처럼 느껴졌다. 인생은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만 보상이 주어지는 거래방식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바라던 ‘미래의 행복’은 쉽사리 다가오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보다 덜 고생한 사람들은 잘 살고 있었고, 나보다 더 애쓴 사람들은 여전히 힘겨워 보였다. 내가 생각했던 방식과는 계산이 맞지 않았다. 그때 고생은 정말 미래의 행복 약속어음인가에 대한 의심이 생겨났다.

아무 고생이나 값이 매겨지는 것은 아니다. 목적 없는 고생은 할인도 되지 않는다. 나는 마흔이 조금 넘었을 때, 잠시 머물렀던 예전 직장에서 기획재정부와 한국개발원(KDI)이 주관했던 지식공유사업을 떠맡은 적이 있었다. 공공기관마다 지식과 제도를 잘 정리해서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에 전파하는 비중 있는 사업이었다. 다른 공공기관에서는 직접적인 사업참여 인원을 최소 3명씩은 배정했는데, 나는 홀로 작업을 수행해야만 했다. 결재라인에 참여자는 많았지만, 책임자는 나 하나였다.


“이 프로젝트만 끝나면 쉬자.”


아침부터 거의 새벽까지 일하던 시간도 많았다. 책상 위에는 커피를 마신 종이컵들이 쌓여 있었고, 수면과 운동은 나중으로 미루었다. 프로젝트는 좋은 평가를 받고 끝났지만, 내게 남은 것은 위염과 허리디스크, 스트레스였다. 상급기관의 무리한 지시도, 조직 내부의 무관심도 묵묵히 감당했다. 약 1년 가까이 고생했던 작업은 끝이 났어도, 그에 대한 보상은 거의 없었다. 인사고과는 조용했고 보상은 미미했다. 성과는 기관의 것이 되었고, 병원비는 나의 몫이 되었다.

고생은 때로 성장의 재료가 되지만, 자동으로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행복을 미루는 명분으로 고생을 소비해 왔다는 사실이 또렷해진다. 미래에 받을 행복을 위해 현재의 나를 담보로 잡아두고 있었던 셈이었다.

이제 나는 고생을 다시 정의한다. 고생은 행복의 선불금이 아니라, 삶을 배우는 수업료에 가깝다. 어떤 고생은 꼭 필요하지만, 모든 고생이 보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스스로 물어야 한다. 이 고생이 나를 더 사람답게 만드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나를 소모시키는 것인지.

그리고 나의 행복은 미루지 않기로 했다. 오늘의 행복은 오늘 안에서 찾기로 했다. 여전히 땀 흘리며 살아가겠지만, 나는 더 이상 고생을 예금하지 않는다. 행복은 이자가 아니라, 오늘 써야만 할 현금이라는 걸 알았다.




※ 작가 소개: 기안장_브런치 작가, 2025년 항공문학상 우수상, 2024년 원주신문 올해의 오피니언상, 밀리의서재 올해의 밀리로드 Top 50, 문장21 시부문 신인문학상, 문학광장 수필부문 신인작가상 수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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