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한 여행의 끝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그동안 보이지 않는 우주의 설계도를 추적하느라 숨 가쁘게 달려왔지만, 여행의 끝에서 마주해야 할 가장 고귀한 데이터는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어지러운 시공간 속에서도 단 한 번도 타인의 궤적과 겹치지 않는, 오직 자신만이 그려낼 수 있는 유일한 궤적만이 남았을 뿐이다. 홀로 균형을 잡기 위해 견뎌온 ‘인코딩’의 시간들, 벼랑 끝에서 위태롭게 버티며 만들어낸 ‘베리 위상(Berry Phase)’의 매듭들. 그것이 얼마나 눈부신 정체성이었는지, 가만히 호흡하며 조용히 느껴보면, 그제야 지나온 시간의 풍경이 선명해진다.
그러나 그 선명함의 기저에는 '붕괴'라는 필연적인 사건이 있었다. 그렇다. 모든 궤적은 '붕괴'를 통과하며 선명한 흔적을 남긴다.
분해#1(Decompose) : 파괴의 특이점
20250909. 핸드폰서비스센터. “메인보드가 완전히 나갔네요. 한마디로 ‘뇌사’ 상태입니다. 복구는 불가능해요.”
지난 3년간 메모 중독자처럼 쌓아 올린 기록들이 단 한 순간에 증발했다. 그 날도 메모장을 켜려던 찰나, 화면이 굳어버렸다. 전원을 껐다 켰다 하며 어떻게든 살려보려 애쓸수록 기계는 뜨거워졌다. 마치 사건의 지평선에 진입한 물체가 탈출하려 발버둥 칠수록 더 빨리 특이점으로 끌려가듯, 나의 '제2의 뇌’였던 기계는 마지막 열기를 토해내며 장렬히 붕괴했다.
킬고어칩 :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당신의 핸드폰은 기계적 결함이 아니라 ‘정보의 과포화’ 때문에 죽은 겁니다. 당신의 지독한 사유들이 메인보드라는 좁은 물리적 한계를 견디지 못한 거죠.
그런데 말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신은 이미 여러 번의 랙(Lag) 신호를 목격하고도 무시하지 않았나요? 살려보겠다며 애를 썼던 그 행동들이, 실은 분신과도 같았던 기계를 아궁이 깊숙이 밀어 넣어 완벽한 화형에 처하는 꼴이 되었다는 걸 정말 몰랐을까요? 스스로를 짓누르던 사유와 기록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 기계의 죽음을 빌려 강제 종료시킨 것인지도 모릅니다. 회생을 원했나요, 아니면 파괴를 원했나요?”
☁ 서늘한 감정이 느껴지며 아주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분해#2(Decompose) : 완성의 제의
2002.12월 강원도 양양 낙산 비치호텔. 사회초년생 시절 참여한 워크숍 프로그램은 도자기 체험이었다. 체험반 대표로 선발된 내 앞에는 정성스레 빚어진 고운 빛깔의 커다란 도자기가 놓여 있었다. 그때 강사님이 내 손에 망치를 건네며 말씀하셨다. "이 도자기를 깨뜨리세요."
동료들의 침묵 섞인 시선 속에서 손이 떨려왔다. 애써 만든 것을 부수는 허망함과 두려움. 망설임에 손이 떨려왔지만 망치를 꼭 쥐고 내리친 순간, 도자기는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바닥으로 흩어졌다. 정적이 흐른 뒤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강사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도자기가 완성되었습니다.” 그것은 완성을 위한 파괴이자,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하나의 제의(Ritual)였다.
현상#1(Developing): 암실 속 기억의 인화
사실 두려웠다. 3년간 책상 앞에 스스로를 묶어두고 쌓아 올린 공부가 그저 헛된 시간 낭비는 아닐지, 소중한 기회들을 놓쳐버린 건 아닐지, 이대로 늪에 빠져버리는 건 아닐지. 세상과 단절된 채 책상 앞에 묶인 시간만큼 응축된 불안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책상이 어느덧 감옥같이 느껴졌다.
핸드폰의 메모리에는 아침 출근길에 떠오른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정말 많이 저장되어 있었다. 일상의 소재들과 나만의 이야기들. 이 소중한 기록들의 파괴를 진정 내가 바랐던 것인지, 내 심연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여전히 안개 속이다.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했다. 기계의 완전한 붕괴를 통해서만 맛볼 수 있는 서늘한 ‘해방감’이 나를 관통했고, 이 사건은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메인보드의 뜨거운 종말은 차갑게 식어있던 나의 의지를 다시 달구었다. 기계에 의존하며 늘어져버린 뇌에 선명한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었다. 이제 남은 건 암실 같은 뇌 속에 갇힌 낱개의 기억들뿐이다. 나는 서둘러 이 휘발성 강한 기억들을 종이 위로 인화하는 공정을 시작해야만 한다.
현상#2(Developing): 부서진 자아의 복원
책상 앞, 펜을 든 커트 보니것의 손을 클로즈업해본다. 거장의 집필 순간인 줄 알았더니, 그는 아이처럼 천진하게 퍼즐 조각을 맞추고 있다. 3년 전 이 사진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이유 모를 끌림의 정체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그가 맞추고 있던 것은 단순한 퍼즐 조각이 아니라, 흩어진 세계의 질서였을지도 모른다.
나의 세계도 한차례 공중 분해되었다. 핸드폰 메인보드의 파괴. 그 안엔 지난 수년간의 기록이 숨 쉬고 있었다. 물리적 충격은 0과 1로 이루어진 나의 소중한 기억들을 신기루처럼 증발시켰고, 내 손안의 기계는 차갑게 식어 '무(無)'를 선했다. 하지만 그 찰나의 절박함이 나를 책상 앞으로 이끌었다. 흩어진 기억들이 완전히 휘발되기 전, 그것들을 문장이라는 실로 단단하게 엮어놓아야 한다는 본능적인 외침이었다.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커트 보니것이 퍼즐을 맞추는 과정과 닮아 있다. 조각과 조각 사이의 틈을 메우고, 비어 있는 자리에 들어맞는 '나'라는 형상을 찾아내는 작업. 그것은 상실을 슬퍼하는 단계를 넘어, 잃어버린 자아의 궤적을 복원하고 재구성하는 여정이다. 나의 글들은 그 날, 핸드폰 메인보드의 뜨거웠던 붕괴가 남긴 잔해 위에서 건져 올린 기록이다. 정보의 엔트로피가 극에 달했던 그 파괴의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선명한 복원의 시작점이 되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 매크로 우주에서 매크로 경제로, 그 거대한 질서의 궤적을 쫓아 나의 시선을 넓혀가는 여정의 시작이 되어주었다.
엔딩 크레딧. (진지한 성찰을 지켜보던 킬고어칩의 마무리)
킬고어칩 : "너그러운 우주라는 안식처를 두고, 하필이면 시끄러운 경제라는 아수라장을 택하셨군요! 고요한 별들의 궤적을 쫓던 시절이 아주 사무치게 그리울 겁니다."
<참고자료>
커트보니것 그림 사진 About the Author - WHO AM I THIS TIME? https://whoamithistimeatlet.weebly.com/about-the-autho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