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보내고
지난 금요일에 모친께서 돌아가셨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충분히 더 사실 것으로 생각했는데 병고가 깊어졌던 듯했다. 새벽녘에 돌아가셨는데 부음이 전해진 것은 아침쯤이었다. 먼저 급하게 KTX 서울발 물금행 열차를 예매했다. 마음이 급한 막내남동생은 비행기라도 타고 오라고 다그쳤지만 항공권 예매는 실행되지 못했다. 우리 집 두 아들과 손자는 때마침 할머니를 만나려고 부산에 내려가 있는 형편이었다. 요양병원 중환자실에 있었던 모친을 오후 두 시에 면회하고자 예약을 했는데 불발이 되고 부고를 듣게 된 처지였다. 두 돌을 넘긴 손자는 끝내 증조할머니를 만나지 못하고만 셈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이 지난 시간쯤이었다. 상복으로 갈아입고 만장을 왼쪽 팔목에 차고 제단에 술잔을 올리고 재배를 한 후 참배를 한 뒤에 문상객 맞이에 들어갔다. 문상객을 위한 안내와 접수는 둘째 아들이 맡았다. VIP 실답게 장례식장은 상당히 쾌적했고 깔끔했다. 음식도 정갈하고 맛깔스러웠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무더위를 식혀주었다. 향불을 피웠고 향이 다 타기 전에 새로운 향으로 갈아놓기도 했다. 국화꽃도 준비되었다. 부고장을 하행선 열차 내에서 카톡으로 올렸는데 문상객들이 부고를 확인한 후 장례식장을 찾는 데는 아무래도 시간이 제법 소요될 것으로 여겨졌다. 모친은 제법 오랫동안 병고를 겪었고 통증에 시달려온 탓에 몸이 많이 쇠약했다. 약물과다 복용 등으로 입맛을 잃었고 통증에 시달려 아픔을 호소하곤 했다. 통증치료를 위해 진통제가 투여되었고 기력회복을 위한 영양제도 투여되었으나 당신께서 삶에 대한 애착이나 의지를 잃으신 것으로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요양병원에서 삼시 세 끼를 제공했지만 거의 식사를 하지 못하였고 전혀 영양 공급이 되지 않으니 회복이 어려웠다. 결국 코를 통해 호스를 연결했고 유동식을 공급하기도 했다. 막바지에는 폐렴까지 겹쳐 중환자실에서 집중치료를 받았다. 병원 측에서는 대형병원으로의 이송도 권고했으니 더 이상의 병원치료가 실효적인지는 의문이었다. 코에 호흡기를 달고 호흡하는 식으로 어렵게 숨을 쉬는 형편이었다. 불러도 대답을 하지 못했고 손을 잡아보아도 제대로 반응을 보여주지 못했다. 한동안은 열이 올라 얼음주머니를 차고 열을 내리는 조치가 취해지기도 했다. 얼마 후 열은 내렸으나 손이 부어올랐다. 간호사에게 영양제를 투여를 당부했고 그렇게 영양은 보충되었다. 내가 최종면회를 한 뒤 이틀 후에 작고를 한 것이다. 임종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문상객으로 오시는 분은 대부분 현직에 있는 막내남동생의 손님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간헐적으로 친척 또는 다른 분들도 오시긴 했다. 세 아들이 상주노릇을 했고 참배실을 지켰다. 향불이 꺼지지 않도록 했고 꽃도 다 소비가 되면 밑에 양동이 통에 옮겨놓기도 했다. 문상객들은 향을 피우거나 꽃을 헌화하기도 했고 혹자는 술잔을 올리기도 했다. 상주들과는 맞절 또는 목례로 예를 갖추기도 했다. 주류는 목례였고 접수대에서 그렇게 반배로 예를 표하기를 권유했다. 계속적으로 맞절을 하다 보면 상주들이 견뎌내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아내는 공무상 몽골 울란바토르 출장 중이었고 귀국예정일은 토요일 오후였는데 하루 앞당겨 귀국 중에 있었다. 일단 오늘 밤에 귀국해서 내일 아침에 KTX를 타면 오후쯤에 장례식장에 당도할 것으로 보였다. 오후 늦은 시간부터 본격적인 문상이 시작되었고 손님들이 줄지어 왔다. 서울시 교육감이 문상을 왔다. 장례식장 근처에 일이 있었고 일정을 소화하고 왔다는 얘기를 했다. 응대를 상주로서 했고 10분쯤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곧바로 일어났다. 배웅을 했다. 큰아들도 상주로서 자리를 지켰고 역할을 수행하고자 했으나 손자를 돌보는 것이 불가피했다. 부친은 내실에 앉아계셨고 간산히 가족친지 종친회 문상객들에 관해 인사를 하기도 했다.
밤 10시경이 되자 참배실도 조용해졌다. 이젠 더 이상의 문상객이 없을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더 늦은 시간에 사촌형 내외께서 문상을 오셨다. 고향에서 오신 상황이었다. 펜션을 운영하시고 계신데 손님이 있어 늦을 수밖에 없었다고 양해를 구했다. 참배실에 불을 하나만 켜두고 정리를 하고 내실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대부분의 가족들은 귀가하고 상주들만 남은 셈이었다.
다음날 날이 밝았다. 오늘의 일정은 입관의 절차가 10시에 있었다. 친견실로 이동해서 모친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식이었다. 수의가 입혀졌고 몸의 구멍에는 솜으로 막혔다. 대렴이라 해서 시신을 끈으로 묶는 절차를 의식처럼 진행했다. 얼굴을 천으로 감싸고 삼베끈으로 몸을 묶었다. 친견을 하면서 모친의 이마에 손을 대보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움을 느껴볼 수 있었다. 몸은 나무덩굴처럼 그렇게 딱딱하게 굳어진 채였다. 친견을 마친 후에는 입관을 했다. 그리고 관위에 명정을 놓고 고정을 시켰다. 그리고 흰 천에 고인의 성명을 맏상제가 펜으로 썼다. 관을 다른 분들과 식별하기 위한 조치로 보였다. 최종적으로 입관절차를 마치고 다시 참배실로 돌아와 성복제를 지냈다. 발인 때까지 세 차례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했다. 오늘 두 차례 내일 발인 전에 제사를 지내는 식이었다. 장례지도사가 절차대로 성복제를 지냈고 잔을 상주가 올렸고 재배를 올리고 마지막에 밥을 물에 말고 재배로 성복제가 끝났다. 이틀째 문상객을 받았다. 동생이 근무했던 봉생병원의 원장이자 국회의장을 지낸 정의화 님이 몸소 문상을 오셨다. 거인다운 포스가 풍겨 나왔다. 자신이 보낸 조화가 보이지 않는다고 확인을 하시기도 했다. 조문대 바로 앞쪽에 놓아두고 비치를 하기도 했다. 조금 늦게 도착이 된 조화였다. 무척이나 아꼈던 당신의 후배의사로 막냇동생을 아끼고 후원했던 것으로 여겨졌다. 처갓집의 동서 처제 처남 등이 문상을 오기도 했고 친구들도 왔다. 사돈네도 몸소 문상을 와서 맏상제가 응대를 했다. 손부도 와서 상복을 입고 문상객을 받는 것에 협조했다. 아내의 문상객도 서울에서 내려오기도 했다. 아내는 지쳐있는 상태였기에 내실에서 휴식을 잠시 취하기도 했다. 저녁의 성복제는 5시에 치렀다. 이틀째 장례절차가 마무리되었다.
장례 33일 차 날이 밝았다. 사촌누님 내외께서 아침 일찍 오셨다. 아침식사를 하셨다. 고모네 사촌누님이 가족과 함께 문상을 왔다. 그리고 발인 후 영락공원까지 함께 했다. 12시에 성복제를 지내고 발인절차에 들어갔다. 리무진에 시신을 싣고 일반 손님 등은 버스로 이동했다. 날씨는 청명하기 그지없이 맑고 쾌청했다. 화장장에 접수를 시키고 나왔다. 오후 1시 30분에 화장장으로의 시신 입고절차가 진행될 것이라고 예고되었다. 리무진에서 시신을 꺼내 운구를 했다. 네 명이 관을 옮겼다. 그러면 시신을 운반하는 수동식 운반구에 올려놓으면 직원이 그것을 홀로 끌고 입고집 입구까지 이동했다. 이동하는 시신을 따라 영정사진과 위패를 든 장손이 앞장서고 뒤를 상주와 가족이 뒤따랐다. 화장장 입고장 옆에 상주, 가족이 일렬로 정렬해서 마지막으로 고인과 작별을 고했다. 여동생이 흐느꼈고 울음을 울었다. 마음이 찢어졌고 아팠다. 순식간에 시신은 화장장으로 이동했다. 곧바로 반대편의 대기장소로 가니 전광판에 화장 중이라는 안내가 나왔다. 그 표식 밑에는 유골함이 있었고 그곳에 영정사진과 위패를 놓아두었다. 화장하는 시간이 한 시간 여가 소요되니 그 시간 동안 옆에 있는 식당으로 가서 요기를 했다. 다시 화장장으로 이동해서 전광판을 바라다보며 기다렸다. 화장 중이 끝나고 발골작업을 하는 모습이 모니터로 나왔다. 한 인부께서 유골을 쓸어 담고 있었고 그것을 유골함에 담았다. 곧바로 유골함을 맏상제가 받아 들고 영정사진을 든 장손을 따라 가족이 줄지어 수골작업을 위해 작업장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수골작업을 통해 이물질을 골라내고 유골을 가지런히 정비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화장장을 빠져나와 버스를 타고 납골당으로 이동했다.
부산추모공원에 도착했다. 상주 두 명이 납골당 안치를 위한 절차를 밟았다. 대금을 정산하고 접수를 시켰다. 145호실 윗단에 안치를 했다. 명패는 편의점에 작업 후 10여 일이 지난 후 부착이 될 것이라고 했다. 안치를 끝낸 후 참배실을 배정받아 제사를 지냈다. 장례지도사의 지도를 쫓아 술을 따르고 재배를 하고 제사를 모신 후 최종 절차를 끝냈고 이제는 버스를 타고 다시 장례식장으로 돌아왔다. 장례식장에서 상복을 반납하고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근처의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해산했다. 장례절차가 마무리된 셈이다. 84년을 사신 모친이 이제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했다. 모친은 참으로 어렵고 힘든 시대를 사셨고 늘그막에는 병고로 인해 많이 고통스러워하셨고 아파했는데 언제나 지극정성으로 삶에 충실하고자 했고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셨고 손자들의 안녕을 기원하시면서도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으셨다. 강한 삶의 의지를 보여주시기도 했지만 누적되어 온 병고의 후유증을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듯했다. 어린 나이에 시집오셔서 평생을 일에 치여 살아오시면서도 언제나 도리를 잃지 않으시려 했고 부모님께는 진심으로 봉양하고 싶어 하셨고 최선을 다해 삶에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자 했던 분이었다. 세상사람들에게 베풀고자 했고 나눔을 실천하고자 했던 지극한 어짐이 자식들의 영화로 빛난 것이었으리라. 60세에 설악산 대청봉을 오르셨고 한계령 쪽으로 하산하시던 그 정정함이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이다. 13시간의 산행을 거뜬히 해내셨던 억척스럽고 강인한 삶의 표본을 보여주셨던 분이었다. 이제 모든 업보를 훌훌 털어내시고 편안하게 안정된 내세의 삶을 보내시기를 간구해 본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평안히 잠드소서... 이제는 모든 근심걱정 다 잊으시고 자신만의 안위만을 돌보시면서 편안히 잠드시고 고통 없이 평안해지시기를 기원드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