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이 처음 외부 투자를 받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매출은 아직 불안정하고, 미래는 밝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이때 투자자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위험하니, 최소한 원금은 지켜달라. 대신 회사가 잘되면 나도 같이 웃고 싶다.”
이 요구를 한 번에 담아낸 도구가 바로 상환전환우선주, 즉 RCPS다.
RCPS는 겉으로 보면 ‘우선주’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주식·채권·옵션이 한데 섞인 복합금융상품이다. 배당과 잔여재산에서 보통주보다 앞서고, 일정 시점이 되면 투자자가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으며, 회사 가치가 커지면 보통주로 바꿔 더 큰 수익을 노릴 수도 있다. 이 세 가지 성격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RCPS는 단순한 투자 계약이 아니라, 회사의 미래 경로를 좌우하는 설계도에 가깝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장치는 청산우선권이다. 회사가 잘되지 않아 매각가치가 낮을 경우, 투자자는 “적어도 내가 넣은 돈만큼은 먼저 가져가겠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1배 non-participating 구조다. 여기까지는 비교적 단순하다. 하지만 participating 구조가 붙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투자자는 원금을 회수한 뒤에도 남은 파이를 다시 나눠 가진다. 파이가 작을수록 창업자의 몫은 급격히 줄어든다. cap이 달린 participating은 절충안이지만, cap 수준에 따라 창업자의 체감 결과는 크게 달라진다. 이처럼 청산우선권은 Exit 가격이 낮을수록 위력을 발휘하고, 높아질수록 의미가 약해진다.
다음은 배당이다. 초기 기업은 보통 배당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RCPS에는 누적배당이 붙는 경우가 많다. “지금은 못 받아도, 나중에 한꺼번에 받겠다”는 약속이다. 시간이 지나면 이 배당은 상환금액에 얹혀 돌아온다. 고정 배당률이라면, 회계적·경제적으로는 이자와 거의 다르지 않다. 즉 RCPS는 점점 주식보다는 채권에 가까워진다.
전환권은 투자자가 웃을 수 있는 장치다. 회사 가치가 크게 오르면 투자자는 RCPS를 보통주로 바꾼다. 이때 전환비율과 전환시점이 중요하다. 전환조건이 투자자에게 유리할수록 창업자의 지분은 더 많이 희석된다. IPO나 M&A를 전환 트리거로 설정하는 경우, 그 시점이 언제 오느냐에 따라 지배구조 변화 속도도 달라진다.
여기에 리픽싱(anti-dilution)이 붙으면 긴장감은 최고조에 이른다. 회사가 다음 투자 라운드에서 더 낮은 가격으로 주식을 발행하면, 기존 투자자의 전환가격을 다시 낮춰주는 장치다. full ratchet 방식은 창업자에게 가장 가혹하다. 전환가격이 신규 발행가로 한 번에 내려가면서, 창업자 지분은 급격히 줄어든다. weighted-average 방식은 완화된 형태지만, 그래도 장기적으로는 지분 구조에 큰 영향을 남긴다.
마지막으로 상환권이 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투자자는 “이제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원금만이 아니라 IRR까지 보장하는 구조도 있다. 이 순간 RCPS는 사실상 만기가 있는 채권처럼 행동한다. 회사에 현금 여력이 없다면, 이 조항은 유동성 리스크로 직결된다. 또한 회계적으로는 금융부채로 분류될 가능성이 커져, 재무비율과 후속 투자 유치에 부담을 준다.
이 모든 장치가 한꺼번에 작동하는 순간은 Exit다. 기업가치가 낮으면 청산우선권이 앞에 서고, 투자자는 보호된다. 창업자는 거의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할 수도 있다. 반대로 기업가치가 충분히 높아지면, 투자자는 보통주로 전환해 창업자와 함께 상승의 과실을 나눈다. RCPS는 이렇게 “아래에서는 투자자를 보호하고, 위에서는 함께 나누는 구조”를 만든다. 다만 participating과 리픽싱이 결합되면, 그 균형은 투자자 쪽으로 크게 기운다.
회계적으로 보면 RCPS는 더욱 까다롭다. 상환권이 있으면 IFRS 32상 금융부채로 분류될 가능성이 높고, 리픽싱이나 고정되지 않은 전환조건이 있으면 전환권은 파생상품부채가 된다. 그 결과 공정가치 변동이 매기 손익에 반영되어 재무제표 변동성이 커진다. 이는 성장 국면의 기업에게 예상치 못한 부담이 될 수 있다.
결국 RCPS는 “돈을 얼마에 받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RCPS를 발행하는 순간, 창업자의 장기 지분, 지배구조 안정성, 재무제표 모습, Exit 전략까지 한 번에 설계하게 된다. 단기 자금 유치 수단으로 접근하면, 몇 년 뒤 회사의 선택지는 크게 좁아질 수 있다. 그래서 RCPS는 계약서 한 장이 아니라, 기업의 미래를 미리 그려보는 전략적 도구로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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