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수탉과 두 도시 이야기

키안티 클라시코 ①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현직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검은 수탉'

도시국가의 국경 분쟁을 끝낸 검은수탉

혹시 와인병 라벨이나 입구 캡실(포일)에서 프린트된 ‘검은 수탉’을 본 적 있나요? 와인과 수탉, 선뜻 연결되지 않는 조합인데요. 오늘은 와인병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검은 수탉이 상징하는 의미와 그와 관련한 전설을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이탈리아어로 ‘Gallo Nero’(갈로 네로)라 불리는 이 문양은 지난 수백년 동안 특정 지역 와인의 병에 쓰여왔습니다. 이탈리아 내에서도 가장 비옥한 축에 속하는 토스카나의 키안티 클라시코 지역에서 양조된 와인을 상징하죠. 키안티(Chianti)는 지역의 이름이고, 클라시코(Classico)는 키안티 지역 내에서도 가장 전통적인 지역(과거 도시가 팽창하기 전부터 키안티라고 불린 지역)을 뜻합니다.

즉, 와인병 어딘가에 검은 수탉이 그려져있다면, 키안티 클라시코 영역 안에서 재배한 포도로 정해진 규칙을 지켜 양조한 와인임을 보증하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어쩌다 검은 수탉이 ‘검증된 와인’을 상징하게 된 것일까요?

그 배경엔 흥미진진한 역사 이야기가 숨겨져 있습니다. 검은 수탉은 원래 피렌체 공화국 시절 키안티 지역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정치 군사기관, 레가 델 키안티(Lega del Chianti)가 사용하던 문양이었습니다. 피렌체에서 생산하는 물건에 검은 수탉이 그려져 있다면, 도시가 보증하는 물건이라는 요즘으로 치면 ‘검증필’ 같은 딱지인 셈입니다.

중세 다양한 도시들의 문장들

‘키안티’ 지역의 상징이었던 검은 수탉

그런데 군사력이 곧 힘이고 지역의 상징이었던 도시국가 시절 용이나 호랑이, 독수리 같은 용맹한 동물이나 성, 칼, 창, 활 등 병기를 상징으로 삼던 다른 도시와 달리 피렌체는 왜 하필 수탉을 상징으로 썼을까요?

전설에 따르면, 13세기 아직 유럽에 르네상스가 꽃 피우기 이전 ‘피렌체’와 ‘시에나’는 국경을 마주하고 지역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던 사이였습니다. 특히 드넓은 밀밭과 포도나무가 함께 자라던 옥토였던 ‘키안티 지역’의 소유권을 놓고 두 도시는 항상 부딪쳤죠.

매번 소모전만 일삼던 두 도시는 어느 날 분쟁을 끝내기 위해 현대의 기준으로는 다소 엉뚱한 방법을 사용해 국경을 정하기로 합의합니다. 각 도시에서 말을 제일 잘 타는 기수들이 같은 날 새벽 수탉이 울 때 각자의 도시를 떠나 달리기 시작해 서로가 만나는 지점까지를 국경으로 하기로 한 것입니다.

재밌는 것은 피렌체와 시에나 사람들이 서로 정반대의 전략을 구사했다는 점입니다. 시에나 사람들은 수탉이 아침 일찍 크게 울어주기를 바라면서 건강한 흰 수탉을 골라 잘 먹이고 보살폈습니다. 반면 피렌체 사람들은 검은 수탉을 골라 상자에 가두고 며칠 동안 음식도 주지 않고 괴롭혔죠.

중부 이탈리아, 피렌체와 시에나 사이 '키안티 지역'

피렌체의 검은 수탉 vs 시에나의 흰 수탉

결전의 날 전날 밤, 피렌체 사람들은 검은 수탉을 풀어줬습니다. 수탉은 해방되자마자 처마 위로 날아 올라가 서럽다는 듯이 울어제끼기 시작했고, 그 울음소리에 다른 수탉들도 엉겁결에 따라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수탉의 울음소리를 들은 피렌체의 기수는 곧바로 시에나를 향해 말을 달렸습니다. 잘 먹고 잘 지내던 시에나의 흰 수탉은 어땠을까요? 매일 그랬듯 동이 틀 무렵 일어나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피렌체보다 한참 늦어버린거죠.

결국 피렌체와 시에나의 기수 두 사람은 시에나 성벽에서 불과 20km 떨어진 곳에서 서로를 만났습니다. 비옥했던 키안티 지역 대부분을 피렌체가 차지한거죠. 그 후 검은 수탉은 피렌체와 키안티 지역의 상징이 됐습니다. 어떤 역사가들은 13세기 후반 시에나가 ‘유럽 은행업의 중심’이라는 지위를 피렌체한테 내주게 된 이유 중 하나로 키안티 지역의 소유권 상실을 꼽기도 합니다.

이 때부터 피렌체 사람들은 타지로 수출하는 자신들의 물건 중 제일 좋은 품질에 자부심을 담아 검은 수탉 문양을 남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키안티 와인의 검은 수탉 문양도 이렇게 시작된거죠. 키안티 와인은 16세기 로마의 교황들이 즐겨 마시기 시작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세계인이 찾는 와인이 됐고요.

실제로 16세기 저명한 화가이자 건축가였던 조르지오 바사리(Giogio Vasari)는 “이것이 키안티 와인이다. 페사(Pesa)와 엘사(Elsa) 계곡 강, 꽉 찬 과실 풍미, 더욱 성숙한 바쿠스가 발을 디디고 있는 훌륭한 와인의 땅. 멀리 카스텔리나(Castellina), 라다(Radda), 브롤리오(Brolio)를 그려볼 수 있는데, 그들의 상징으로, 젊은이가 팔에 들고 있는 방패에는 키안티를 대표하는 황금 들판의 검은 수탉이 있다”라고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검은 수탉 문양의 변천사

'검은 수탉', 피렌체의 자부심으로

검은 수탉은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의 상징으로 현재까지도 쓰이고 있습니다. 그 디자인이 세월에 맞춰 몇번 변경됐지만 모두 키안티 지역의 와인을 상징했습니다.

특히 지난 2005년부터는 이탈리아의 원산지법에 따라 단순한 관례적 상징을 넘어 법률로 정하는 키안티 클라시코 원산지 상징(DOCG)으로 승격되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법률로 정한 지역에서 생산된 포도로, 법률로 정한 전통 방식으로 생산한 와인에게만 주어지는 ‘DOCG 등급’을 받는 모든 와인 병에 의무적으로 부착하도록 하고 있죠.

그렇다면 수백년동안 세계인의 사랑을 받아온 키안티 클라시코의 매력은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