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버폐 Oct 19. 2024

3. 메밀꽃밭에서 그대와 함께 차를

문화제 일기

3. 메밀꽃밭에서 그대와 함께 차를


다시 또 소풍 아니, 출근(?)이다.

아침마다 시간 맞추어 집 밖을 나가는 일을 하지 않던 내게는, 공간으로는 소풍이지만 시간으로는 출근이다. 소풍 도시락 싸듯 먹을거리와 서귀포에 계신 스님으로부터 선물 받은 안나푸르나 히말라야 산자락에서 자란 찻잎으로 만든 홍차를 우려낼 물도 넉넉히 챙겨나선다.


학교 선생님이 아닌 이상 시간 맞춰 '출근'하는 삶과는 거리가 멀었던 산골이 지금은 시간 맞춰 출근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논보다는 밭이 많은 시골이기에 농사를 짓는 곳이 더 많으나 옛날처럼 품앗이를 하지는 않는다.

씨앗을 심고 살피고 약을 치고 거두는 일 모두를, 인력 업체에서 밭으로 집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을 시간 맞춰 차로 실어 나르는 게 이곳 현실이다.


한편 '메밀꽃 필 무렵' 소설에 나오는 메밀꽃으로 축제를 열고 부터인지 그전 부터인지 전국에서 농사지은 메밀일지라도 봉평에 있는 가공 공장을 거친 뒤에는 봉평메밀이 되는  메밀 가공 공장들이 들어섰다. 

주 5일 동안 아침마다 출근을 하고 저녁 때면 퇴근을 하는 어떤 공장에서는 메밀국수 메밀가루, 메밀묵가루, 메밀식혜, 또 어떤 공장에서는 국수와 가루는 기본이고 단메밀차, 쓴 메밀차를 또 어떤 공장에서는 메밀막걸리, 메밀묵을 만들어낸다. 메밀을 재료로 하는 식당이나 카페 또한 제법 많다.

뿐만이 아니라 스키장이 있고 계곡이 있는 관광지라 3교대 또는 2교대 하는 곳도 있다.

고속도로 IC로, 소 돼지를 잡는 도축장으로, 글램핑장으로, 스키장 앞 호텔들로, 전국에서 몇 곳 안 되는 청소년 수련원이 그렇다.

또한 문화의 고장답게 군(郡) 읍내도 아닌 리(里)지만 개봉작을 상영하는 영화관이 있는데 직원들이 2교대로 근무를 한다.


7,80년대까지만 해도 오로지 농사로 입에 풀칠을 해야 했고 틈틈이 산나물이나 약초를 캐서 파는 게 돈벌이의 전부였기에 돈벌이는 무조건 서울(그때 우리는 대처는 무조건 서울로 알았다)로 나가야 했다. 초등학교 또는 중학교를 졸업한 선배들이 대처로 나가 (부잣집 식모, 버스차장, 방직공장이나 봉제공장, 장갑공장, 벽돌공장에 다니며) 돈을 벌다가 명절 때 고향 마을로 오면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듯 부러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산골에선 못 보던 (대처에서 사 온) 선물이며 산골 특유의 궁기(窮氣)를 벗은 듯 보였기 때문이다.



공장이라는 말 자체가 딴 세상 말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던 그때, 동네 오빠의 며칠 공장 체험기는 웃지 못할 전설 같았다.

그는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짓다가 열일곱에 친구들과 대처에 있는 빵공장에 들어갔단다. 면접 때 빵을 주기에 게눈 감추듯 먹었더니 더 주더란다. 그마저도 걸신들린 듯 먹고..., 어쨌든 일을 시켜서 하는데 일은 눈에 안 들어오고 빵이 담긴 상자만 눈에 들어와 자기도 모르게 그 빵을 배 터지게 먹었단다. 그 결과는 "나가라"였고..., 빵만 먹다가 쫓겨나서는 다른 데로 갈 엄두는 못 내고 며칠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로.


그야말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이 아닐 수 없다.


메밀꽃밭으로 출근은 하지만 돈을 벌지는 못한다.

열흘 문화제를 준비하는 동안 봉평면과 이웃 면에는 아르바이트할 사람을 구한다는 글귀가 곳곳에 떴다. 처음에는 시급 11.000원 했다가 나중에는 13,000원까지 올라갔지만 문화제 개막일까지도 글귀는 사라지지 않았다. 산골이라 일손 구하기가 쉽지 않다. 문화제가 아니라도 시급 알바를 구하는 글귀는 늘 보이니 말이다.


우리 부스에서 가까운 곳의 매표소에도 알바로 온 이들이 세 명 있었는데 주말에는 (특히 더) 곤욕을 치르곤 했다. 그들은 기본 시급보다 쪼금 더 받는 대가로 '입장료가 왜 이리 비싸냐?'부터 둘러보다가 길을 잃고 다른 데로 갔다가 다시 들어오려는데 안 된다고 하면 '왜 못 들어가게 하냐?', '이게 풀밭이지 메밀꽃밭이냐?', '왜 돈을 받냐?' 따위의 시비를 감내해야 했다. 가끔은 단체관광버스로 온 구경꾼이 막국수집부터 들러 반주로 마신 술이 과해 술김에 뱉는 시비까지도.


 우리는 누가 알아보거나 알아주지도 않는 일을 자청해서 하는 거였다. 그렇다고 자원봉사도 아니다. 책을 들고 나와 펼쳐놓긴 했어도 하루에 한 권도 안 팔리고 많이 팔려야 몇 권인데 그마저도 카드기를 빌려온 책방에 10% 떼어주어야 했고, 누군가 엽서나 부채 만들기 체험을 하고 사면 2,000원을 깎아주기로 했는데..., 그나마 문화재단이나 창작기금을 지원받아 출판한 책이라면 책값은 안 들지만 나 같은 경우는 저자가로 사 와야 하는 데다 어떤 때는 선물로 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밥도 사 먹어야 하고, 내 책이 다른 작가의 책 보다 많이(?) 팔린다 싶으면 음료수라도 사야 마음이 편한 상황이고 보면, 시간과 일을 모두 돈으로 환산하는 사람들이 본다면 도저히 납득이 안 갈 일이리라.


소풍인 듯 소풍 아닌 듯한 사흘 째 해날(일요일) 또한 관광버스로 온 구경꾼들이 많았다. 그들 거의는 (식당에서 점심) 먹고 (사진) 찍고 후딱후딱 걷기 바쁘다. 주어진 시간 안에 될 수 있으면 많이 둘러보는 걸 목표로 한다는 듯.

울긋불긋 그러나 비슷비슷한 아웃도어를 입은 사람들은 삼삼오오 사진을 찍으면서 다니다가 '저기는 뭘 파는 곳일까'하는 호기심으로 한둘이 우리가 있는 곳까지 들어오기도 했다. 책들이 펼쳐져 있어도 차를 우려내고 있으니 "메밀차 파는 덴가 보네." 하면서 두세 걸음 들어오다가 바로 돌아서 나가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돌아다니느라 목말랐다며 좋아라 마시고 가기도 했다.

사진동호회, 가족, 친구, 부부가 왔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다니는 이들은 드물고 제가끔 다니다가 전화로 서로의 위치를 알려주는 사람들, 서로 또는 같이 모델처럼 사진을 찍으면서 다니는 친구와 연인들..., 주말은 확실히 사람이 많다.

덩달아 아르바이트도 많았다. 그들은 주로 꽃밭에 들어간 사람을 내보내는 일을 했는데 뜨겁고 후덥지근한 날에 얼굴이 벌게지도록 그 넓은 메밀꽃밭을 돌아다니면서 "들어가지 마세요! 나오세요!"를 외치고 다니다  보니 얼마가지 못해 목소리에는 신경질과 짜증이 묻어 나왔다. 그러자 꽃밭에 들어간 이들 또한 고분고분 나오기는커녕 성질을 낸다. 우리 앞의 포토존에만 들어가도 저 멀리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오니 그 모습들을 보고 있는 우리도 날카로워질 것만 같아 아르바이트하는 젊은이에게 오지랖을 떨어본다.

"여기에는 의자가 있어 들어가는 거니까 무조건 들어가지 말라 하면 안 될 듯요."



 

어쨌든, 문화제는 쇠날(금요일)부터였지만 개막식은 흙날(토요일)에 했기에 사람들이 더 많았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리고 올해는 외부에서 온 총감독이 축제 기획을 맡았단다. 총감독은 축제조직위원들과 부딪쳐가며 그전에는 늘 하던 걸 또는 하지 않던 걸 하였는데, 겉으로만 봐도 달라진 게 있었다. 우선은 열흘 동안 쿵작쿵작 요란하던 '각설이 공연장'과 그 옆에 짝꿍으로 있던 '야시장'과 주차장이 가까이에 없다. 그리고 주무대를 책으로 꾸몄다. 듣자 하니 전국에서 2,500권 남짓을 기부받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셀럽의 책 읽기'라는 일정과 함께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유명인(황창연 신부, 최재천 교수, 이윤석 코미디언)을 초대했단다.

그리고 첫날 개막식날은 평창에 계시는 그렇지만 전국으로 이름난 황창연 신부님이 다녀가셨다.



주무대에선 날마다 다른 프로그램이 펼쳐지고 있었고 사람들도 많았지만 우리가 있는 곳과는 거리가 멀어 들리지도 않았다. 우리 또한 일정표를 알기에 참여해보고 싶어도 상황이나 체력이 따라주지 않았고 간절함도 없었던 듯하다.


달날(월요일), 최재천 교수님이 주무대로 오신다니 마음 같아선 시간 맞춰 가고 싶지만, '오늘의 작가'로 앉아 있어야 하는 날인 데다 함께 마음공부를 하는 벗들이 실전 공부 삼는 날이기도 해서 아쉽다 하는 마음만 알아주기로 했다. 그런데, 그럼에도 가만히 앉아서 만나 뵐 수 있었다.


셀럽으로 초대 됐지만 스스로 셀럽이라고 여기진 않을 것 같은, 이름 앞에 '동물행동학자' '생명과학자' '생태학자'로 먼저 일컬어지는 최재천 교수님이 총감독의 안내를 받으며 우리 부스에 오셨다.

국립생태원 1대 원장을 하셨을 때의 경험담을 들려주시는 걸 방송으로 본 적이 있고 자연 생태의 중요함과 심각함을 알리는 정보를 배우며 액정 화면으로만 만나는 분을 실제 뵈니 반가운 마음이  일어 차를 권했다. 진심으로 권하긴 했지만 의자에 앉으실 줄은 몰랐다.




의자는 탁자와 한 덩어리로 붙어있어 편하게 걸터앉을 수가 없다. 다리를 번쩍 들어 올려 의자를 넘고 앉아야 하는데, 그렇게 앉으시던 교수님이 엉거주춤 다시 일어서면서 "못이 튀어나와 위험하다"며 망치 같은 걸 찾는다. 놀라서 살펴보니 타카못이 뾰족하게 나와있다. 옆에 있던 디카시 작가가 얼른 돌멩이를 주워 왔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못이 있는 곳을 땅땅 내려친다. 번갈아가며 내려치고 손으로 몇 번 쓰다듬듯 문질러 보고 땅땅 내려치고 다시 문질러 보길 거듭한 뒤 꺼끌 거림이 뭉그러진 걸 확인한 뒤자리에 다시 앉으신다.

내 잘못은 아니지만 참으로 죄송했던 순간이다.


죄송해하는 마음을 아셨는지 차를 달라 신다.

안나푸르나 설산에서 온 차라는 말과 함께 저의 고향에 와주셔서 고맙다는 말도 보탰다.

그랬더니 당신 고향은 강릉이라 신다. "아, 그럼 본관이 강릉..., 강릉이세요?" "아니에요. 저는 동주 최 씨예요. 지금의 철원이지요." "동주 최 씨는 처음 들어봐요. 당연히 강릉일 거라 생각했어요." "예, 동주 최 씨는 이성계로부터 몰살을 당하면서 희귀성이 됐어요. 전국에 15,000명 정도밖에 없거든요. 강릉에 살면서 아마도 강릉 최 씨 인척 하면서 살아남았을 거예요."


지구 환경을 위한 펀딩 리워드 티셔츠를 보기 좋다 하시는 최교수 님과 총감독 & 사인을 하는 디카시 작가와 버폐.

안내를 하던 이는 얼른 자리를 옮기고 싶었을 테지만 교수님은 찻잔을 비워가며 속기(俗氣)를 뺀 수행자가 오래된 인연에게 말하듯 자분자분, 목소리와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으시다.

처음 만난 인연이 오랜 인연처럼 편안하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삶의 연륜이 배려와 지혜, 기품(氣品)으로 승화되지 않으면 애를 써도 쉽지 않은 일이다.

나와 디카시 작가는 시집을 선물로 드렸다.



 

나는 남이 쓴 책도 쉽게 선물하는 편이 아니다. 진심으로 읽고 싶어 하거나 책을 좋아하는 이에게만 선물하는 편인데 하물며 내가 쓴 책이랴.

그럼에도 선뜻 (시집을) 드릴 용기를 냈던 건 소설가이자 시인인 아는 작가님의 칭찬 덕분이었다.

연륜으로 보나 지식으로 보나 배움으로 보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수준의 어른께 감히 말이다.


"이제 그만 자리를 옮길까요?"라는 총감독의 말에 "그러시죠." 하면서도 "사인을 해달라" 요청하셨다. 드리긴 했지만 싸인까지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먼저 싸인을 해달라시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작가라고는 하지만 햇병아리에 지나지 않으며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파랗게 젊은 변두리 작가에게 사인을 받겠다고 기다리는 일은 보통의 내공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라고 본다. 젊잖게 서서 기다리는 모습에 저절로 존경심이 우러나왔다.

사실 존경심은 강조하고 강요한다고 나오는 게 아닌데,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다. 그 시간 그곳에 있던 우리 담마벗들과 디카시 작가도 그렇게 느꼈단다. 진짜 어른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러고 보니 축사 또는 공연이나 강연을 하러 와서 (넓은) 메밀밭 곳곳을 찬찬히 둘러본 분도 기억에는 처음이다.

달날은 확실히 흙날이나 해날 보다는 사람이 없었다. 바빠서 밥 먹으러 갈 시간 없을 것 같아 도시락을 싸 오신 담마벗들과 여유롭게 점심을 할 정도로.

(4편으로 이어집니다.)

작가의 이전글 2. 메밀꽃밭으로 소풍 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