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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가진 힘을 생각하다

추억 일기

by 버폐

노래가 가진 힘을 생각하다


기이일을— 돌리려고- 바라암 부는- 로 걸어도오오오 아-서지이- 않는-것은-

얼콰하니 좀 취하신 날이면 부르시곤 하던 아버지의 애창곡이 들리는 날은 우리 집에 정적이 흘렀다.

가슴에 이 가슴에--- (중략)-- 다지도 깊을 줄은— 난 정말 몰랐었네~

감정을 듬뿍 넣고 힘을 팍 준 다지도’가 지나고 ‘아아아아---’로 넘어가면서 노래가 끝날 즈음,

그 시간이 초저녁이면 나를 비롯한 우리 아우들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야 했다.

발음이 살짝 꼬인 맥락 없는 말을 다짐받듯 “알았어? 어, 알았냐고?”

아버지로서 분명 (또는 어른으로서) 잔소리가 아닌 훈계를 하셨을 테지만,

“어른들 주무시니 그만 조용히 하고 주무시라” 또는

“객쩍게 술주정하지 말고 일찍 주무시라”는 어머니의 말에 나 또한 지레 술주정으로 여겼는지

(나의) 기억엔 이렇다 할 말씀이 남아있지 않다.

분명한 건 얼마나 자주 부르셨는지 돌아가실 때 겨우 열 살이던 아우도 기일을--’ ‘다지도’를 기억할 정도고, (지금 생각하니) 얼마나 자주 취하셨었는지 또한 알겠다.



그러나 나는 아우와 다른 노래로 아버지를 기억한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노래는,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우우울어 잊어—버리-인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고옹아-- 일엽편주 두우우둥실--- 낙화암— 그늘에 울어나 보자---

제목도 잘 모르고 어느 가수가 불렀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아버지가 즐겨 부르셨다는 건 분명하게 기억하는 그 노래를, 가족과 떨어져 혼자 타향살이할 때 속절없이 밤마다 몹시도 생각났다.

아버지는 어떤 마음 어떤 심정일 때 부르셨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시절 나는 잠을 자려고 눕기만 하면 고향 집이 생각나면서 덩달아 아버지가 부르셨던 노래도 스멀거렸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그리웠던 건 아니다.


아버지는 (쓸데없이) 아주 엄하셨다. 밥상머리에서는 물론이고 편한 시간에도 우리 남매들은 떼를 써보거나 무얼 해달라고 조르거나 팔이나 어깨에도 매달려 보질 못 할 정도로. 우리 남매들은 “아빠”라고도 부르질 못했다. ‘아빠’라는 말은 ‘본 데 없는 애들이나 하는 말’이라며 무서운 얼굴로 야단을 치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노래가 생각났던 건 노래를 부르시던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뭔가 아련하고 아릿한 그리움이 진득하게 묻어났고 눈물까지 빼게 하는 힘이 느껴져 (객쩍게도) 밤마다 베갯잇을 적셨던 거다.




고모님 말씀에 따르면 아버지는 노래를 잘하시는 편이라고 한다.

면내인지 읍내인지 콩쿨 대회만 나가기만 하면 상을 타곤 하셨다니 잘 부르시긴 한 모양이다. 이렇듯 남의 말하듯 하는 건 상을 타오시는 걸 볼 수도 없이 마흔도 되기 전 서둘러 세상을 뜨셨기 때문이고, 지금처럼 영상이나 녹음 시설을 갖추고 살지 못했던 때라 아버지의 목소리를 다시 들어볼 방법이 때문이다. 게다가 목소리라서 인지 (희미하게라도)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고 상상도 되질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희한한 건 우리 남매들이 노래를 곧잘 부른다는 사실이다. 바로 밑에 아우는 아마추어 밴드 보컬을 한 적이 있고, 그 밑에 아우는 동네 노래자랑 대회에 나갈 때마다 상을 받고, 막내아우 또한 잘 부른다는 소리를 듣는다니 (아마도) 아버지로부터 DNA를 물려받은 모양이다.

나 또한 (잠깐이지만) 가수 소리를 들은 적이 있으나 지금은 노래와 담쌓고 산 지 오래고,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가 귀에 들어오질 않는 건 물론이고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생각도 당최 나질 않는다. 그럼에도 (다른 노래와 견주었을 때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노래는 몇 곡 있다.

열다섯 살 때 반했던 노래, ‘무엇이 너와 나를 슬프게 하나’다.

난난나---나-나---나난나---나—나난나안나---난난나-나난나안나---


가슴 밑바닥에서 끌어올린 절규하는 듯한 난난나---나-나---나난나---나—’ 목소리가

떨리는 음으로 끊어지다가 다시 이어지는 도입부가 강렬했다면,

무엇이~~~ 너와 나르을--- 스을프~게~~ 하~나---

앙상한— 나뭇-가지인가--- 비에 젖은-- 꽃잎-들인가~~~

로 이어지는 노래는 한탄하듯 탄식하듯 이어졌는데, 솔직히 말하면 노랫말보다는 한 낱말 한 낱말을 가슴 저 밑바닥에서 끌어올리는 듯, 맺힌 한을 뱉어내듯 부르는 음정(音程), 그 음정에 간당간당 붙어있는 듯한 탄식조감정을 좋아했던 듯하다.

어린 게 무슨 한이 있었겠는가마는 한(恨)을 토해내듯 청승맞게 부르곤 했으니 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수 얼굴은 잘 모르고 노랫말 또한 중간중간 헷갈리지만 이름과 제목만은 지금까지도 기억난다.




그 무렵에 만난 또 다른 노래는, 대학가요제 입상 곡인 ‘백팔번뇌’, 첫 소절에 훅-- 마음을 뺏겼었다.

염주 한 알 생(生)의 번뇌 염주 두 알 사(死)의 번뇌

백팔 염주 마디마다 님의 모습 담겼으니-!

마찬가지로 노랫말은 온전히 기억나지 않는데 노랫가락은 아직도 생각난다.


‘백팔번뇌’를 좋아하던 그때만 해도 나는 물론 우리 가족은 (절에 간 적은 있어도) 그 어떤 종교도 의지하지 않았다. 초등학생 때 (생각해 보니 초파일 날) 동네에 있던 (알고 보니 천태종 포교당) 친구 집, 진부 친척 집에 간 김에 갔던 오대산 월정사, 고모 집 가까이 있는 수원 용주사가 전부며 신앙심이나 호기심도 아닌, 그저 어린아이기에 집안의 어른이 이끄는 대로 따라간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전각(殿閣)이나 전각 안 형상(形狀) 또는 그날의 상황 따위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십 대를 흔히 사춘기를 겪는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한다는데 여드름 하나 나지 않았지만, 그때가 나에게는 질풍노도 사춘기 때였는지 모를 일이다. 혼자 있는 걸 좋아했고 누가 말 붙이는 걸 싫어했으며 가슴을 후벼 파내듯 부르는 노래를 좋아했다.

그 시절 좋아했던 노래를 보면 하나 같이 비슷한 곡조로 또래 아이들이 좋아하던 명랑 발랄한 노래는 한 곡도 없다. 이를테면 (또래들이) 춤을 추면서 노래 부르는 전영록을 좋아할 때 나는 조용필을 좋아했다. 그러나 ‘단발머리’처럼 경쾌하고 빠른 노래는 안 좋아하고 앨범마다 한 곡씩 들어있는 (‘한오백년’ ‘간양록’ ‘생명’ ‘한강’처럼) 피 토하듯 부르는 노래를 좋아했던 건데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른다.



지금에서야 말이지만 어렸을 때 ‘백팔번뇌’라는 제목과 노래에 마음을 뺏기고 흥얼거렸다고 하니 전생 신앙을 믿는 사람들은 말한다. 전생(前生)에 승려였나 보라고. 솔직히 그런 전생은 모르겠고 수십 년 전에 들었던, 또는 좋아했던 노래와 곡조를 지금도 떠올리는 걸 보면 노래가 가진 힘이 아주 강하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우리 민족은 (지구마을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절망스러울 때나 힘이 들 때도, 슬플 때나 기쁠 때도 노래를 불렀고, 일할 때나 이별한 뒤에도 노래를 부른다. 노래가 가진 강한 힘을, 가나다라 배우듯 배우지 않았어도 몸으로 삶으로 익혀 아는 것이다. 그렇게 삶의 한 꼭지가 되었다는 걸 대대로 물려주고 물려받고 있다.

우리 강원도 사람들, 특히 여인들에게도 삶과 하나인 노래가 있다. ‘정선아라리’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궁궐 짓고 기와집 지을 나무를 뗏목에 싣고 떠난 남편, 돌아오지 않는 까닭은 필시 장마 물살에 휩쓸려 가 죽었기에 못 올 거라는 소문을 애써 눙치며, 검은 구름이 앞산을 덮으면 한탄조의 노래를 불렀던 거다. 그리고 정선아라리는 정선에서만 부르는 건 아니라는 사실, 호미질에 시름을 덮고 뽕잎에 희망을 따서 담던 그 시절엔 노랫말만 달랐을 뿐이지 평창의 우리 할머니 어머니도 읊조리듯 중얼거리듯 넋두리하듯 부르곤 하셨던 노래가 아라리다.



이별의 슬픔을 엷게 만들고 소금꽃 피워내는 힘든 일도 견딜만하게 해주는 노래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는 멀리 볼 것도 없이 지난 코비드-19 때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른바 K팝 문화가 세계를 주름잡는 오늘날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부르시던 노래들은 가요무대나 국악한마당에서나 겨우, 그것도 일부러 보질 않으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한물 아니 두세 물 간 듯했다. 코로나가 온 지구 온 나라를 덮치기 전까지는 분명 그렇게 보였다. 흘러간 노래 특히 우리 부모 세대들이 좋아했던 트로트를 좋아하는 젊은이들은 거의 없었다. 있어도 ‘취향 독특!’으로 여겼다.


그러나 일찍이 없었던 바이러스가 온 지구마을을 쑤석거려 온 세상이 불안과 공포심으로 들끓을 때 영악한(?) 프로그램 기획자들에게 이끌려 나온 트로트 경연은 불안과 공포를 잊게 했다. 아이돌처럼 젊은, 아니 어린 가수들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불렀을 노래를 구성지게 부를 때마다, 순위에서 떨어지고 붙을 때마다 사람들은 자지러졌다. 만약, 코로나가 의도하고 지구마을을 덮친 거라면 뻘쭘해했을 만큼.

뿐만이 아니라 남편이 세상을 떠나 날마다 슬퍼하고 힘들어하던 어느 여인의 애별리고(愛別離苦)도 해결해 주었다. 노래는 그렇게 21세기의 시름도 덜어주었다.




어디 그뿐인가! 느닷없는 계엄으로 대다수 국민이 불면증에 위경련 신경성 질병으로 이중 삼중고를 겪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은 미스터 트롯이나 현역 가왕에 빠져 ‘난 그런 거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노래말처럼 해맑게들 보내고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이 광장에 모여 다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노래가 가진 힘으로 집단 자가 치유를 한다.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 마~~ 눈앞에선 우리의 거~~친 길은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


예전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 같은 민중가요였는데, 요즘은 흔히 K팝이라고 하는 노래를 마치 아이돌 그룹의 공연장에서처럼 발랄 경쾌하게 떼창을 한다.

격세지감(隔世之感)이 아닐 수 없다.

구호와 함께 울려퍼지는 소녀시대의 노래 '다시 만난 세계'가 신선하고도 찐한 감동을 주는 노래로 들리는 신기한 현상까지 일으켰다.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 가는 거야~ 다시 만난 우리의~~

젊은이들이 부르는 빠른 춤곡인데도 나이 든 이들이 함께 즐기고 있음을 보면 참 알다가도 모를 게 노래인 듯하다. 하지만 곡조만 있어도 안 되고 노랫말만 있어도 안 되며 때와 상황에 맞게 노랫말이나 곡조가 받쳐주면 더 강해지는 묘한 힘이 숨겨져 있는 것이 노래다.

젊을 때는 시름을 잊게 해주던 노래, 시름 대신 외로움으로 변한 늘그막 인생에서는 외로움을 덜어주고 있는 노래, 거님길에서 흥얼거리듯 혼자 불러도 좋고 광장에서 여럿이 떼로 불러도 좋은 노래. 이런 노래를 누가 맨 처음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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