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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by 애프릭

기억이 맞다면 서울이 전혜린을 알게 된 것은 첫사랑 덕분이다. 짝사랑하던 그녀가 전혜린을 언급했고 서울은 책을 찾아 읽었다. 전혜린은 독일에서 유학했다. 독일의 여류작가 중에 루이제 린저가 있다. 그는 루이제 린저의 작품도 읽었다. 그녀의 소설 <삶의 한가운데>에 나오는 니나의 모습은 막 성인이 되어 연애를 시작한 서울에게 영향을 미쳤다. “언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라는 대사는 지금도 기억난다. 한국의 고독한 천재 전혜린, 독일 현대 문학의 거장 루이제 린저, 독일 사회운동의 여전사 로자 룩셈부르크, 이 세 명을 아는 것으로 서울의 지적 허영심은 하늘을 날았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며칠 전, 서울은 문득 요즘에도 전혜린을 읽는지 궁금했다. 쿠팡에 뜨긴 하는데 내용이나 댓글을 보니 별 주목을 받지 않는 듯하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그녀의 수필 제목으로 알고 있었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 하인리히 뵐이 1953년 발표한 소설 제목이었던 것이다. 전혜린과 루이제 린저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서울은 충격에 빠졌다. 이제라도 소설을 읽어야 하나 했으나 노안이 온 지 오래다. 그래서 소개글만 읽었다.


이야기는 1950년의 9월 30일 토요일에 시작해서 이틀 후인 10월 2일 정오경에 끝난다. 주인공 프레드는 보잘것없는 직업들을 전전하다가 지금은 가톨릭 교구관에서 전화교환수로 일하고 있다. 그는 아내 캐테와 세 명의 어린 자식들과 두 달째 떨어져 살고 있다. 공정하지 못한 성직자와 주택위원회 회장의 방해로 6년 동안 기다려왔던 주택 배정이 무산되자 프레드는 단칸방생활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온다.


그의 아내 캐테는 프레드의 가출에도 불구하고 가족에 대한 사랑과 신앙심으로 살고 있다. 전쟁 중에 쌍둥이를 잃은 캐테는 싸구려 호텔방에서 프레드와 보낸 하룻밤으로 네 번째 아이를 갖게 된다. 캐테는 프레드를 여전히 사랑하지만 단칸방으로 돌아오려 하지 않는 그와 헤어지기로 결심한다. 프래드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시내를 헤매면서 가난의 굴레와 자신의 무력감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신부의 심부름으로 은행으로 가는 중에 우연히 캐테를 목격하고 뒤를 쫓다가 죽은 아이들의 무덤을 찾는 그녀의 모습에서 사랑을 느끼고 가정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전혜린의 책 제목으로 들었을 때는 알아주지 않는 천재성, 당시 사회에 면면했던 여성에 대한 편견, 아버지의 인정을 갈구했으나 채워지지 못한 욕구에 대한 저항의 의미라고 생각했다. 소설에서는 아내에게 화해를 청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1972년 <여인과 군상>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작품이니 '사랑과 전쟁' 드라마 수준으로 쓰여있지는 않을 것이다. 전쟁 초기에 가졌던 신념의 붕괴, 사회복지 제도의 문제점, 믿고 의지했던 가톨릭 교회의 부조리가 잘 나와있으리라. 그런 무력감에서 벗어나게 한 것은 자기와 같은 슬픔을 겪고도 가슴으로 담아내는 아내의 뒷모습이다. 거기에 무슨 말을 더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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