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솜이

행운의 부적

by 팔레놉시스

바삭한 햇살이 코끝을 스칠 때, 하얀집 마당에는 클로버가 피었다.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수풀을 뒤적여야 행운의 돌연변이를 찾을 수가 있는데, 나는 그 이름을 남들과는 다르게 호명한다. 요솜이. 아마도 나는 평생 네잎클로버를 요솜이라고 부를 것이다. 어릴 적 꿈이란 허무맹랑한 상상력이었다. 하굣길에 깎아지른 언덕을 헉헉대고 오를 때면, 제발 누가 학교부터 집까지 백화점에서 본 에스컬레이터를 놓아주기를 바랐다. 그런 몽상에 흠뻑 빠졌다가 뙤약볕이 지겨워 전봇대 그림자에 몸을 숨기면서도, 한 사람만 생각하면 마음이 선선해졌다. 가을운동회 계주의 마지막 주자처럼 내달려 현관문에 가닿고 싶었다. 한여름 왼 팔목이 시큰거려 파스를 붙인 적이 있었다. 어린 동생은 뭐가 그리 궁금한지 토끼눈을 뜨고 파스의 용도를 물었는데, 난 아프지 않게 해주는 것이라 답했다. 그날부터 로맨티시스트의 기억력을 가진 아이는 작은 오빠가 집에 오면 네모난 파스부터 붙여주었다. 자기가 한 일을 뿌듯해하며 싱긋 웃는 아이. 그 표정이 사랑스러워서 나는 ‘파스중독’에 걸렸다. 시뻘건 팔목에 진물이 흘렀지만, 가장 귀해하는 사람의 선의를 훼손하고 싶지 않았다. 감동 앞에서 통증은 별것이 아니다. 동생은 시간의 구름을 타고 걱정 많은 청년이 됐다. 달마다 주택청약을 붓고, 첫 월급으로 가족에게 저녁을 산다. 초로의 아버지에게 말끔한 정장을 선물하고, 저녁상을 차려주는 고모에겐 생활비를 드린다. 그런 아이가 요새 몸이 천근만근이란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모질게 구는지 모르겠다고 한숨짓기도 한다. 일상에서 선의의 배반을 겪을 때 피부가 얇은 사람들은 더 아프다. 잘 웃는 아이가 속상하다니, 그날 밤거리가 야속했다. 어스름이 깔릴 무렵, 아이는 가로등 어귀에서 네잎클로버를 꺾어왔다. 손톱마다 풀물이 든 아이는 가족들에게 요솜이를 알뜰히 소개했다. 공백 없는 행복을 느낀 최초의 순간이었다. 그 고마운 사람에게 따뜻한 저녁밥을 사주고 싶었는데,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가족들도 쉽사리 만나지 못하는 요즘이 안타깝지만, 달리 방도가 없으니 돌아가는 길에 글을 쓴다. 혼잣말 같은 편지이지만, 봄 햇살 아래서 한번쯤 싱긋 웃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