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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니치 Sep 07. 2023

역사는 현재·미래를 비추는 거울

과거는 현재이고 미래다.




서구 최초의 지적문명을 선도하던 그리스의 황금기를 극적으로 끝내버린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역사)』를 쓴 그리스 역사가 투퀴디데스(BC 460?~BC  400?)는 오늘날 미중 패권전쟁을 예견이라도 한 듯 책머리에 집필 동기를 이렇게 썼다.     


  “인간사에서는 미래가 과거를 그대로 반영하지는 않지만 닮은 측면이 있다. 만약 인간의 본성에 따라 언젠가는 비슷한 형태로 반복될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려는 사람이라면, 내가 쓴 이 역사 기술이 유용할 것이다.”     


역사는 그대로 반복되지 않을 뿐 그 패턴·운율을 반복한다. 오늘날 굴기하는 중국과 쇠락하는 미국과의 관계는 고대 그리스에서 부상한 아테네와 기존의 지배세력 스파르타 간의 관계와 유사하다. 이에 착안, 미국의 저명한 안보·국방 분석가인 앨리슨은 그의 책 『예정된 전쟁』(2017년)에서 미중 패권경쟁을 이해하는 프레임으로 ‘투퀴디데스 함정(Thucydides's trap)’을 제시했다. 


 ‘투퀴디데스 함정’은 새롭게 부상한 신흥세력이 현 지배세력의 자리를 넘볼 때 발생하는 ‘불가피한 전쟁의 위험’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말은 미중 패권경쟁이 시작된 2018년, 파이낸셜타임스 (FT)가 ‘올해의 단어’로  선정할 정도로 많이 사용되었다.      


미중 패권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인 2017년에 앨리슨이 2,500년 전의 ‘투퀴디데스’의 『역사』를 소환한 이유는 무엇일까? ①역사가 현재와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고, ②보다 먼 과거를 되돌아볼수록 더 먼 미래가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를 지배함으로써 미래를 통제하려는 앨리슨의 자의적인 역사 해석, 즉 미국의 자기중심적 사고이거나 함정이 있는 프레임일 수도 있다.     


 1. 과거는 현재·미래를 비추는 거울     


역사상의 수많은 역사가와 역사학자들은 나름대로 역사를 정의했다. 대체로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역사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들이 고민한 역사의 의미·역할은 대체로 3가지였다. 역사는 탐구한 진실의 기억·기록이고, 현재적인 의미·교훈을 주는 지식이며, 미래를 예측·활용할 수 있는 지혜의 보고라는 것이다. 역사는 현재의 우리에게 관련 지식을 배가시켜 주고, 교훈과 통찰력을 제공한다. 미래를 예측해 지혜롭게 대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역사는 진실의 탐구·기록      


서구에서 헤로도토스(BC 484~430) 이전의 고대 그리스인들은 역사를 ‘비극’과 혼동했다. 신화의 시대에 역사는 재미있는 옛날이야기, 즉 전해지는 각종 신화와 전설, 영웅담을 담은 소설이나 서사시였다.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하거나 극적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실정에서 그리스의 3대 역사가들인 헤로도토스와 투퀴디데스, 폴로비오스는 사실과 진실을 탐구·기록하는 것을 역사 서술의 제1 원칙으로 삼았다. 그 공로로 그들은 각각 역사의 아버지,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 응용사학의 선구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헤로도토스는 신화가 지배하는 그리스 세계에서 인간 ‘역사의 시대’를 연 최초의 역사가였다. 그는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이 신의 섭리나 계획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는 패러다임을 깼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인 페르시아전쟁을 현장을 누비며 탐사하고, 그 전후 과정과 결과를 기록한 보고서를 남겼다. 


그가 쓴 『페르시아전쟁사(역사)』에서 처음 사용했던 역사(history)라는 말의 어원은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 등에 대한 ‘진실의 탐구·탐사, 기록’을 의미한 역사(historia)이다. 그는 합리적으로 ‘역사를 기술하는 방식’을 처음으로 고민했다. 그는 역사적 사건의 발생 원인과 그 사건이 남긴 역사적 의미에 대해 ‘탐사’를 시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헤로도토스와 거의 동시대의 역사가인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역사)』를 통해 역사를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아테네의 패전 장군 출신인 그는 그리스 패권을 둘러싼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 전쟁의 원인과 전개, 그 과정에서 드러난 인간과 국가권력, 국제정치의 행동 패턴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그는 후세의 역사에서 다시는 그리스 아테네와 같은 타락과 잔혹, 파멸의 비극이라는 실수를 재현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역사를 기록했다. 오직 사실만을 말한다며 사실에 기초한 인간의 역사를 썼다.    

 

기원전 2세기, 에게해를 중심으로 한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오스(BC 200~118) 또한 진실을 추구한 역사가였다. 그는 로마의 마케도니아 정복 과정에서 인질로 잡혀 로마에서 활동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투퀴디데스의 후계자를 자처한 그는 기원전 220년에서 기원전 146년까지의 로마의 성장기를 다룬 『역사(로마사』를 썼다. 


그의 관심은 로마인들이 어떻게, 어떤 제도 덕분에 53년 만에 전체 지중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는지 기술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전과 다른 다양한 역사 서술 방법을 시도했다. 역사 서술에서 현장에 대한 오감적 조사와 관찰, 면밀한 사료 수집과 인과적 설명을 중시하고 ‘관점의 균형’을 강조했다. 특히 진실한 역사만이 응용 가능한 의미 있는 교훈을 낳는다며 ‘진실’을 강조했다. 


그리스 시대의 역사 서술 방식은 로마의 전성기인 기원전 1세기경~기원후 2세기경에도 계승되었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이 그것이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대표적 역사가인 에드워드 기번(1737~1794)은 『로마제국 쇠망사』를 저술, 역사학의 발전에 공헌했다.


19세기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로 알려진 랑케(1795~1886)는 역사학에 ‘과학’의 성격을 부여해 역사학을 학문 영역의 하나로 정립했다. 랑케는 역사를 ‘과거에 있었던 사실의 객관적인 편찬’으로 정의한다. 역사가는 종교나 정치·권력에서 벗어나 과거에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을 정확하고, 공정하게 서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세기에는 ‘역사학의 폭발’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역사학이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까지 역사와 역사학이 ‘지내온 세월의 진실을 찾는 작업’이어야 한다는 큰 강조점은 변함이 없었다.


지난 2,000여 년 동안 역사학계에서 ‘진실’을 강조한 이유는 역사가 그 중요성만큼이나 왜곡·조작됐기 때문이다. 역사가 정말 진실한가? 에 대한 의문은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되었다. 중국에는 자고무신사(自古無信史: 자고로 공인된 역사는 믿을 게 아니다.)란 말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詩)가 역사보다 진실하다.”라고 말했다. 예술은 진리에 대한 관심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지만, 역사는 당대의 사건을 바라보는 역사가의 관점에 의해 기술되기 때문이다.   

  

역사는 과거·현재와의 대화     


이렇듯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진실이었다. 17세기 이후 실증주의와 경험주의 역사가들은 사실을 빈틈없이 정확하게, 그리고 공정하게 수집·기록하는 것을 자신들의 임무로 생각했다. 거짓 역사는 아무런 가치·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19세기 이후 과학으로서의 역사학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과연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 서술이 가능한가?라는 문제였다. 주관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이 기록한 사실이 과연 사실인가? 또 사실을 그대로 기록한다고 해도 그 역사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 의문에 대한 답은 20세기 현대의 역사학자 E. H. 카(1892~1982)가 내놓았다.      


그의 역사관은 역사의 ‘사실들’은 현재의 역사가들이 ‘선택한’ 것일 뿐 객관적인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역사는 역사가가 확인된 사실을 모아 놓고 자기 마음에 드는 방법으로 요리한 것, 즉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카는 경험적 사실에 매몰된 보수주의 역사학을 비판했다. 역사학자는 필연적으로 시대와 사회의 일부라는 처지를 기꺼이 인정해야만 사실을 선택·해석하는 데서 객관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역사란 무엇인가』(1961)라는 저서에서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 과정, 즉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했다.  “우리는 현재의 눈을 통해서만 과거를 조망할 수 있고, 과거에 대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역사가는 자신의 해석에 맞추어 사실을 만들고, 또한 사실에 맞추어 해석하는 끊임없는 과정에 종사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역사의 기능은 과거와 현재의 상호관계를 통해서 보다 깊은 이해를 진전시키는 데 있다.”고 강조한 것이다.


카에게 ‘역사의 연구’는 사건 또는 사실의 원인을 밝히는 작업이었다. 그는 “사실은 스스로 말하는 게 아니다. 역사가가 말을 걸 때만 말한다.”며 역사에서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에게 역사의 해석은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보고, 그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과거를 과거 그 자체로만 보지 않고, 그 역사적 의미를 캐내야 과거의 사실이 현재와의 관계에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카의 현재에 대한 문제의식과 그의 역사관은 결국 미래에 대한 전망과도 연관된다. 그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이자, 사실·사건들과 서서히 등장하고 있는 미래의 목적들 사이의 대화라고도 말한다.  

    

역사의 중요한 기능은 미래 예측·응용


역사가는 과거를 상기하고 미래를 상상한다. 역사를 알면 미래가 보이고, 비전을 공유할 수 있다. 

20세기 중반까지 역사학계는 역사의 무게 중심을 과거·현재에 두었다. 이후 지구촌이 복잡해지고, 불확실·불안정성이 증대되면서 역사학의 관심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역사 해석에서 과거의 역사가 주는 현재적 의미를 중시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예측·준비하는데 역사를 어떻게 활용·응용할 수 있는가를 고민한 것이다. 


역사학은 1970년대 이후 사회과학과 인문과학 전반에 불어 닥친 바람, 즉 ‘무엇을 위한 학문인가?’라는 질문에도 답해야 했다. 사회과학 분야의 행정학에 정책학이 더해진 것과 같이 주류 역사학에는 ‘응용역사학’이 대두된 것이다.


응용역사학은 주류 역사학과 달리 역사적 선례 및 유사 사례를 분석해 현재의 곤경을 설명하고, 적절한 선택에 도움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새로운 학문이다. 역사학도 과거·현재만이 아니라 미래를 예측하고, 처방을 통해 국가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학문을 지향한 것이다.     


21세기 미중 패권전쟁의 와중에 응용역사학이 특별한 관심을 받는 이유는 점점 악화되고 있는 미중 패권전쟁의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미래를 알 수 있다면 그에 잘 대비할 수 있다. 그만큼 이익도 얻을 수 있다. 고대의 예언과 점성술에서 오늘날의 수학적 알고리즘과 미래학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수많은 방법들을 고안해 왔다. 이는 개인 차원에서나 집단 혹은 국가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미래 예측 없이는 지향할 목표를 설정할 수 없고, 목표 달성 활동에 착수할 수도 없으며, 그 결과도 고려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2,500여 년 전의 역사가들도 역사의 기능으로 역사의 교훈적 측면과 미래 예측 활용을 간과하지 않았다. 헤로도토스와 투퀴디데스는 역사적 사실을 진실하게 기록해 후세들에게 도덕적 관점과 교훈적 가치를 전하고자 했다. 그들을 따라 배운 폴리비오스도 미래 세대를 위한 실용적인 역사관을 견지하고, 성찰적·비판적이며, 교훈적인 역사 서술을 지향했다.      


역사학을 공부한 저명한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지적 성찰, 즉 고전에서 문제들의 답을 찾고자 했다. 르네상스 시기 역사학자인 마키아벨리 (1469년~1527년)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자 하는 사람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라.”고 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고대의 시기에서 그와 유사한 사례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 (1874년~1965년)도 “국제정치의 미래를 알고자 한다면 고대로 돌아가라.”고 했다. 현대 세계란 고대 세계의 연속이고, 세상사에 대한 통찰은 오래된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란다. 처칠은 영국인들이 뽑은 ‘가장 위대한 영국인’,  타임스(Times) 지가 선정한 ‘20세기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그는 불굴의 용기와 지혜, 솔직함으로 위태로운 시기의 영국을 굳건한 지도력으로 이끌었다. 패권 제국의 핵심 업무인 통상·식민·해군 장관을 연이어 31년, 총리를 9년이나 역임한 정치 거인이었다. 


치와 문학, 웅변 등 다방면에 걸친 그의 탁월한 역량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한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19세기까지의 유럽 역사 탐구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서양의 역사·철학을 섭렵해 얻은 통찰과 지혜, 유머와 재치를 현실 정치에 응용했다. 각종 『역사』를 읽고서 대영제국의 해외 정책, 즉 세계 패권전략을 수립·운용한 현대의 응용사학자였다. 그의 저서 『세계의 위기(1차 대전 회고록)』, 『제2차 세계대전』에는 노벨문학상이 주어졌다.   

  

미국의 세계 패권은 응용사학자들의 역사적인 통찰과 지혜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은 그리스·로마, 특히 로마 제국을 밴치마킹해 국가를 수립했다. 마한과 매킨더, 스파이크만 등 저명한 지정학자들이 제기한 패권 이론과 주장들을 적극 활용해 거대 패권국으로 성장했다. 


20세기 전반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의 설계자’, ‘미 제국의 책사’로 활약한 조지 케넌은 외교관이자 정치가·역사가였다. 1970년대부터 미국의 대외전략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핸리 키신저는 역사학을 전공한 정치학자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늘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고, 미래의 전략을 설계했던 응용사학자였다. 


키신저와 함께 현대의 저명한 국제정치학자인 폴 케네디, 미어샤이머, 앨리슨 교수는 미국 대외전략의 기초이론을 제공하는 대표적인 응용사학자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하나 같이 과거를 통해 미래를 본다. 역사를 통해 미국이 당면한 현재의 도전들을 인식하고 대응전략을 제시하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미래는 끝없는 역사의 사슬 속에 서로 얽혀 있다. 국가가 정책·전략을 수립할 때는 미래를 읽어 현재를 결정한다. 미래가 현재를 창조한다. 새로운 미래를 읽어 내는 능력이 곧 국가의 생존과 경쟁력을 좌우하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궁극적 이유는 과거·현재가 아니라 미래라는 것이다. 


역사가 미래 전망의 유용한 도구인 이유 중 하나는 인간과 역사는 어느 정도 정형화된 패턴을 반복한다는 점에 있다.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역사의 패턴을 발견하고, 미래를 예견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인간과 권력 등으로 구성된 국제정치의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미래 세계를 알려면 고대 최고의 역사가와 철학자들이 이해했고, 또 어떻게 헤쳐나갈지 그 해법을 알았던 때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래 <표-1>에서 보듯 근래 미국에서 발간된 미중 패권과 관련한 수많은 국제정치학 저서 대부분은 고대 또는 지난 500년 동안의 서양 패권사 분석서이다. 모두 응용역사학적 접근을 통해 현 상황을 설명하고, 미래를 예측해 전략적인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역사의 활용, 즉 응용역사학의 과제는 역사를 과거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다. 이스라엘의 전쟁사 분야 석학인 크레펠트 교수는 그의 저서 『예측의 역사』에서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 예측을 위한 학문”이라며 역사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선언했다. 역사의 실용성을 강조한 책들도 다수 발간되고 있다.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봄으로써 현실 문제를 분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방법론으로서 응용역사학의 가치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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